[현장스케치] 기아차 노동자 인권위 옥상 고공농성

서울 한복판 시청 일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주하다.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시민들 사이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건물이 높게 솟아있다. 땅에서 15m 떨어진 인권위 건물 옥상 광고탑, 그곳에 사람이 산다. 기아자동차(기아차) 화성지회 사내하청분회 소속 노동자 최정명 씨(45)와 한규협 씨(41)다. 오는 18일(금)이면 이들이 하늘 위에서 피뢰침 기둥에 의지해 버텨온 지 100일이 된다. 폭 1.5m에 난간조차 없는 좁은 공간에서 끈으로 몸과 기둥을 묶고 잠들었다 화들짝 깬 적도 수차례다. 건물 아래에선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 힘을 보태고 있다.

▲ 소나기가 쏟아졌던 지난 2일(수) 기아차 화성지회 사내하청분회 소속 노동자 최정명 씨와 한규협씨가 인권위 건물 옥상 전광판 위에서 농성하고 있다. 사진: 김여경 기자 kimyk37@snu.kr

◇최 씨와 한 씨가 광고탑 위를 지키는 이유=두 노동자가 고공농성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중앙지법은 노동자들이 제기한 근로자 지위확인소송에서 “모든 기아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며 “근로자보호법에 따라 하청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판결했다. (『대학신문』 2014년 11월 23일 자) 당시 노동계와 언론은 희망찬 미래를 떠들어댔지만 1년이 지나도록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기아차는 판결 직후 즉각 항소하겠다고 나섰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법원이 기아차 사내하청을 불법파견으로 규정한 것만 7차례지만 기아차는 여전히 법원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한규협 씨는 “이미 유사 판결이 여러 번 나온 상황에서 10년 넘게 걸리는 대법원 판결까지 기다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8개월 넘게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사측은 지난 5월 금속노조 기아차 지부와 특별교섭을 시도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특별교섭에 참여할 권한이 정규직 노조 위원장에게만 부여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도 없었다. 사측은 전원이 아닌 사내하청 노동자 465명만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채용 확정자들은 소송을 취하하고 다시는 소를 제기하면 안 된다는 조건도 있었다. 465명을 선발할 기준에 대해서는 일절의 언급도 없었다. 한규협 씨는 “사과를 받아야 하는 입장인 우리가 회사 눈치를 보면서 줄 서야 하는 내용의 기만적인 합의문”이었다며 “비정규직 조합원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내하청 분회장이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정규직 간부가 일방적으로 합의를 밀어붙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최정명 씨와 한규협 씨는 특별교섭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은 유동인구가 많고 건물이 높아 시민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인권위 옥상 위 광고판을 선택했다.
 

◇갑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을들의 싸움=하지만 고공농성은 또 다른 싸움의 계기가 됐다. 고공 농성자들이 서 있는 전광판이 광고회사 명보애드넷 소유의 개인재산이기 때문이다. 고공 농성자들이 전광판에 무단으로 올라가 플래카드를 걸고 무기한 농성을 시작하면서 광고회사는 영업에 큰 손실을 봤다. 명보애드넷 오상연 전광판 담당관은 “이미 광고주 대부분은 광고를 취소했고 남아계시는 분들도 농성이 끝나야 다시 계약을 재개할지 고려해보겠다고 말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규협 씨는 “처음 고공농성을 시작할 때 광고판에 대한 소유권을 고려하지 못했다”며 “개인 사업자 영업에 손해를 입혀 정말 죄송하다”고 미안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농성 초반에는 명보애드넷 영업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명보애드넷과 노조가 협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하는 상황에서 급기야 명보애드넷은 고공 농성자들을 상대로 형사소송과 손해배상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명보애드넷의 손을 들어줬고 한규협 씨와 최정명 씨는 현수막을 철거하고 건물에서 내려와야 할 뿐만 아니라 1일당 100만원의 범칙금을 내야 한다. 이후로도 명보애드넷과 노조의 실랑이가 계속됐고 감정의 골도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기아차는 한 걸음 떨어진 채 상황을 관조하고 있다. 기아차 신문홍보팀 김진태 씨는 “고공농성과 관련해서는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다”며 “드릴 말씀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데 기아차가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다. 참여연대는 보도자료를 통해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는 사측의 태도가 결국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며 “원청이 불법과 편법으로 버티면서 노동자들까지 불법으로 끌어내렸다”고 비판했다. 갑이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자리에는 을과 을의 싸움만 남았다.

 

사진: 김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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