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주관하고 발행하는 신문은 늘 딜레마를 안고 있다. 언론에 ‘대학’이라는 특수성이 가미될 때에, 취해질 수 있는 노선은 크게 두 가지다. ‘대학’에 초점을 맞추어 캠퍼스의 문화와 정보를 재미있게 전달할 수도 있고, ‘언론’ 기능에 충실하여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사를 제공할 수도 있다. 전자는 이미 다양한 캠퍼스 잡지들이 몫을 다하고 있다. 후자에 치중한다면 굳이 대학이란 공간에서 만들어질 이유가 사라진다. 고로 대학언론은 두 가지 노선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나가는 것이 요구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요구에 『대학신문』은 잘 부응해왔다고 생각한다. 대학가에서 포착되는 이슈들을 전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여기서 보편적인 문제 제기를 이끌어냄은 『대학신문』이 지닌 큰 미덕이다. 대학이란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학언론만이 줄 수 있는 선물과도 같다. 특히 『대학신문』의 <기획>코너는 학내와 학외를 넘나들며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대학가 이슈에서 출발하지 않고 곧바로 보편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문제되는 대목은 아니다. 대학이 ‘지성의 정수(精髓)’인 만큼, 보편적일지라도 지성을 충분히 자극하는 내용이라면 대학언론의 정체성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지난 8월 31일에 발행된 『대학신문』의 <기획>코너 역시 학내 이슈에서는 조금 벗어났지만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억의 여백을 울리는 작은 북소리’라는 제목을 단 기사는, 영화 「암살」을 계기로 거세게 일고 있는 이른바 ‘김원봉 논란’을 예시로 들며 말문을 연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양철북』의 작가인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의 생애와 역사관을 고찰하는 것이 기사의 주된 목적이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필자는 문학을 전공함에도 불구하고 귄터 그라스에 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생애와 역사관을 각각 균형 있게 다루면서도 해당 분야의 권위자들을 인용하여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는 기사는 필자에게 더없이 유익했다. 다만 기사를 다 읽고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 의구심이 있었다. 『대학신문』은 귄터 그라스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왜 하필 ‘김원봉 논란’을 언급했던 것인가.

해방 후 월북한 독립운동가인 김원봉을 둘러싼 논란은 ‘좌-우 대립’ 혹은 ‘진보-보수 대립’으로 설명되는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이 깊다. 이 문제는 비단 김원봉에 한해서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양자 간 대립 문제를 귄터 그라스에 연결시켜 논의한 것은 부자연스럽다. 기사에 따르면 귄터 그라스의 주된 역사관은 ‘패자를 위한 역사’다.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 논쟁은 나치 독일 문제처럼 승자-패자의 프레임이 쉽사리 적용되지 않는다.

귄터 그라스의 역사관이 한국의 역사 인식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이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패자를 위한 역사’라는 그의 슬로건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면 김원봉 논란 이외에 다른 역사 문제가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독자의 흥미를 끌어내는 연결고리는 적어도 논리적인 정합성을 갖추어야 의구심이 생기지 않는다.

늘 훌륭한 기사를 제공해주는 『대학신문』이다. 대학언론으로서 보편적인 내용을 담을 때에 보다 정확한 인식이 우선시된다면, 앞으로도 독자들에게 더욱 신망받는 언론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강민호

국어국문학과·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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