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이종건 기자 jonggu@snu.kr

구한말, 열강의 각축 속에서 조선은 풍전등화, 백척간두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살 길을 모색하기 위해 고종은 1880년 8월, 수신사 김홍집을 일본에 파견해 정보를 수집하게 했고, 김홍집은 귀국하면서 주일청국참사관 황준헌이 작성한 『조선책략』을 들고 와 조정에 제출했다. 그 핵심내용은, 당시 동양으로의 영토 확장을 꾀하던 러시아에 맞서기 위해 조선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속하고 미국과 연결’(親中國, 結日本, 聯美國)하는 정책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정의 논의를 거친 후 이 제안은 조선의 기본외교노선이 됐고, 『조선책략』의 상당 부분의 내용이 그 후 실행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줄을 잘못 선 건지 균형을 잘못 잡은 건지 모르겠지만, 조선은 청국, 일본, 러시아 등의 세력에 휘둘리다가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됐다.

지난 3일 중국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승리 기념일’(이하 전승절)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것을 두고 뒷말이 많았다. 미국의 ‘혈맹’이라는 한국의 대통령이 이 행사에 참석한 것을 두고 특히 일본의 여론이 좋지 않은 가운데

, 「산케이 신문」의 한 칼럼니스트가 박 대통령을 민비에 빗댄 내용을 게재해 원성을 샀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한말 조선이 내외 정세 변화에 따라 사대의 대상을 번갈아 바꾸었듯이, 그 유전자를 계승한 한국 역시 완벽한 사대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조선에는 박 대통령 같은 여성 권력자가 있었는데 고종의 왕비였던 민비이며, 그녀는 러시아를 끌어들였다가 암살을 당했으며,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가도 그런 사대주의 외교라는 이야기다. ‘사대주의’가 아니라 ‘균형외교’이며, ‘민비’가 아니라 ‘명성황후’이며, 암살을 ‘당했다’가 아니라 일본이 암살을 ‘했다’로 고쳐 써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분분했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냉혹한 국제관계의 현실 속에 놓여 있는 한국의 처지를 새삼 일깨우게 하는 해프닝이었다.

중국은 이번 전승절 행사에서 병력 30만명을 감축해 세계평화를 수호하겠다고 천명하는 한편, 미국 본토까지 타격할 수 있는 각종 첨단 무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시진핑 국가주석은 “세계는 아직도 안정되지 못한 상태이고 다모클레스의 칼은 여전히 인류의 머리 위에 걸려 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다모클레스의 칼은 한 올의 말총에 매달린 칼 아래 앉아 있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임을 의미하는 서양의 고사성어인데, 1961년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핵전쟁의 위험을 이에 빗대 언급하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50여 년이 지난 후 중국의 지도자가 이 표현을 열병식장에서 다시 꺼내든 것이 꽤나 의미심장하다. ‘다 같이 조심하자’인지, ‘너희도 조심하라’인지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주변 강대국들의 힘겨루기 속에서 ‘밀당’해야 하는 한국의 머리 위에는 칼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게 아닐까. 게다가 구한말과 달리 현재 한국이 상대해야 할 플레이어가 하나 더 늘었으니, 바로 우리의 ‘주적’으로 지목되는 북한이라는 변수다. 만약 황준헌 같은 사람이 오늘날 존재한다면, ‘( )북한’의 괄호 안에 무엇을 채워 넣을까. 130여 년 전, 그의 마지막 일갈은 다음과 같았다. “남을 야만 오랑캐라고 하여 더불어 같이 하지 않고 있다가 변(變)이 일어나면 비로소 온전하기를 구하는 것은 무책(無策)이다.

 

장준영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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