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외교학부 이상신 강사

단테의『신곡』에서, 지옥문 앞에는 “나를 거쳐 가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릴 지어다”라는 경고가 붙어있다. 즉,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을 벗어날 희망의 부재가 지옥을 규정한다. 최근 빠르게 인기를 얻는 ‘헬조센’이라는 유행어에서도 이와 유사한 인식의 편린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은 선진국이 못돼서가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이 없어서 지옥이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좀 낯선 이 단어에서 읽을 수 있는 젊은이들의 냉소와 좌절, 그리고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과 전망은 무엇일까?

(1) 흔히 제시되는 헬조센의 사례는 재벌들의 횡포, 형편없는 복지제도, 공중도덕의 문란, 사법적 정의의 부재, 편파적인 언론과 무기력한 정치권, 기성세대의 탐욕과 젊은 세대에 대한 착취 등이다. 한국 사회에서 극소수 ‘금수저’를 제외한 다수 개인들은 지옥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2)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희망의 부재다. 민주적이고 공정한 투표로 정권을 교체하고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조물주보다 높은 것이 건물주”라는 자조적인 농담에서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 물려받은 재산 없이 개인의 ‘노오력’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불가능하다.

(3) 애국주의를 냉소하는 젊은 세대에게 헬조센을 ‘갓조선’으로 바꾸어서 모두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보자고 호소하는 것도 먹히지 않는다. 국가에게 더 이상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지 말라는 답이 돌아올 뿐이다. 따라서 헬조센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 땅을 떠나는 것, 즉 ‘탈조센’ 뿐이다.

이렇게 헬조센의 담론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 ⇰ 변화 가능성의 부정 ⇰ 각자도생의 해결책으로 이어진다. 냉소와 비관적 미래인식의 측면에서 헬조센 담론은 일베의 독설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일베의 독설이 타자화와 배제라는 파괴적인 해결책으로 귀결되는 반면, 헬조센의 경우는 타인에 대한 공격성 대신 개인적 출구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약간 건전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헬조센의 인식이 등장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변화의 실패, 그리고 희망의 부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투표를 잘하면,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를 비판하면, 팟캐스트로 기득권의 ‘꼼수’를 폭로하면, 진보정당을 결성하고 그들을 국회로 보내면, 소수자들이 연대하면, SNS로 정치적 소통의 공론장을 열면, 그러면 세상이 바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기획들은 실패해버렸고 그 결과 이 땅을 뜨는 것밖에는 별 다른 희망이 없다는 헬조센의 냉소가 터져 나온 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20대의 투표율은 2008년 이후 꾸준히 높아져 왔다. 즉, 젊은이들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항상 선거의 결과는 젊은 세대의 기대를 배반했고, 이 연속된 실패의 경험이 헬조센의 냉소주의를 이끌어냈을 것이다.

누구나 변화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야 하는지, 누가 그 변화를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자격이 있는지, 그 변화를 위해 치러야 할 희생을 누가 더 감당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 이 전망부재의 상황이 우리 모두를 질식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해결책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역사는 항상 우리에게 해결 가능한 문제만을 제시한다고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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