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주 사회부장

역사가의 주관으로 해석된 역사
기자의 시선으로 재구성된 기사
그 속에서 최소한의 진실을 찾기 위해
사실과 해석의 경계에서 균형 지켜야

지난 10일(목) 2015년 국정감사가 시작됐다. 노동개혁과 재벌개혁, 포털사이트의 뉴스 공정성과 함께 한국사교과서 국정화가 3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같은 교과서를 두고서도 정부와 여당은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긍정사관”이라 평하는 반면, 야당을 비롯한 반대 여론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임시정부·독립운동·민주화는 축소한다”며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이번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은 객관적이어야 하지만 결코 전적으로 객관적일 수는 없는 역사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의 성격을 논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 바로 레오폴트 폰 랑케와 에드워드 카다. 랑케는 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료에 충실한,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카는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며 역사가가 해석한 사실이 곧 역사가 된다고 했다. 랑케는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했지만, 사관(史官)이 역사를 기록하는 순간부터 후대의 역사가가 사료를 읽는 순간까지 역사가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오히려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 아닌가 싶다.

누구나 역사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말이다. 역사와 비슷한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기사다. 기자는 기사에 팩트(fact)만을 담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팩트만 담아서도 안 된다. 갑의 횡포로 억울하게 해고당한 노동자의 사연을 담은 기사에서 사측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없다면 기자 정신이 담긴 기사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터뷰건 현장이건 기자가 문제의식을 갖고 뛰어들지 않는다면 기사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사에는 취재를 통해 알아낸 사실을 기반으로 기자의 주장과 그에 따른 사건의 재구성이 담겨야 한다. 그런데 이 역시 역사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말처럼 이상주의적인 말이다.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다보면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어떻게 써야 공정한 것인지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때로는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부조리하기도 하고, 가해자라고 생각한 쪽이 피해자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나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를 한 분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분이 사측에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어 기사로 쓰기엔 부적절한 것이 많았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보니 취재를 다녀온 후 기자가 속기록 뭉치를 손에 쥐고 울상을 지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게 드문 일만은 아니다. 기자뿐만이 아니다. 이는 기사를 수정하는 부장과 편집장, 심지어 간사와 주간 교수까지 신문사에 있는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고민이다.

그러나 해석이 분분한 역사에도 최소한의 사실은 있듯이 아무리 복잡하고 온갖 주장이 난무한 사안에도 최소한의 진실은 있다. 그 사실을 찾기 위해 기자는 열 몇 명의 인터뷰를 따야 하고 사안과 관련된 모든 주체를 만나야 한다. 이를 게을리 한다면 기사는 ‘왜곡’이 되고 기자는 ‘기레기’가 된다. 역사가 왜곡되고 역사가가 편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번호 신문을 만드는 지금 이 순간도 『대학신문』의 기자들은 그 고민을 안고 있다. 어떤 내용을 더 늘려야 할지, 누구의 입장을 실어줘야 할지 시계가 자정을 넘어가는 지금까지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다. 사실과 해석의 경계에서,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기 위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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