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학과 정수경 강사

예전에 성경을 읽으며 예수는 왜 그렇게 비유를 사용해 이야기하기를 즐겼을까 궁금했더랬다. 직설적으로 선명하게 말하면 더 잘 알아들을 텐데. 성경 속에 그 답이 있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심판을 피하라 하더냐.” 예수는 독사의 자식들, 메시아의 구원의 진정한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이해 못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비유는 알아듣기 어렵다. 비유가 담고 있는 화두에 관해 평소 고민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로서는. 그러나 평소에 그 화두, 그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단박에 그 비유가 뜻하는 바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비유의 관건은 고민의 폭과 깊이이다.

현대미술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여겨지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1917년 작 ‘샘’은 비유의 바로 그런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학교 안팎에서 강의를 하면서 ‘샘’을 아는지 물으면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소변기’의 명성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다시 질문을 던져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난감한 표정을 짓거나, “일상품도 작가의 선택에 의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뒤샹의 진술을 액면가대로 되읊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조건 속에서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샘’은 그 이상의,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그 섬광 같은 깨달음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혀 샘의 비유를 풀어내는 것은 내가 이 글을 쓰는 까닭에 배치되므로, 이만 함구하고 그 답을 각자의 ‘고민’에 맡겨야겠다. 한 가지 힌트만 주자. ‘샘’을 볼 때 그것이 이미 얻은 명성, 그에 대한 굳어진 해석을 잠시 지울 수 있다면, 그래서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첫인상을 되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샘’의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다. 물론, 비유의 온전한 해독은 오직 보는 이가 ‘미술’ 그 자체에 대해 고민해온 폭과 깊이에 달렸지만. 이 비유를 풀어냈던 많은 현대 미술가들이 뒤샹을 극찬하고 스스로 뒤샹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으며, 그로 인해 뒤샹의 ‘샘’이 2004년 터너상 시상식에 모인 각국 미술계인사들로부터 후대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20세기 작품으로 뽑혔던 것이다.

고민의 폭과 깊이가 이해의 지평, 앎의 깊이를 좌우하는 상황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학기말 페이퍼를 받고, 학회에서 논문 발표를 듣고, 학술지 논문 심사를 할 때도 관심과 고민의 지평이 학문의 깊이, 앎의 폭을 좌우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좋은 페이퍼는, 좋은 논문은, 좋은 학문은, 좋은 앎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석학이라고 일컫는 이들의 학문의 공통점은 아마도 그 가장 밑바닥에 인간과 인생과 세계에 대한 고민이 깔려 있으며, 그들의 사유가, 글이 그 고민의 해결에 바쳐져 있다는 점 아닐까? 가끔 생각한다. 석학들의 사유세계가 수수께끼마냥 어렵게 느껴지는 까닭은 내가 아직 그들의 고민의 지평에까지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수수께끼 같던 석학의 사유가 스르르 풀어졌던 어떤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그 순간의 열쇠는 역시나 더 많은 지식의 축적이기보다는 더 많은, 더 깊은 고민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고 있다면, 가장 잘 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는 만큼 보는 데서 만족한다면 우리는 기존의 앎을 뛰어넘을 수조차 없을 것이다. 앎의 즐거움을 누리되, 많이 아는 데에 만족하지 말자. 공부하기 전에 살고, 살면서 고민하고, 고민하며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고민의 답을 찾아갈 때, 우리는 아는 만큼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심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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