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고전 사이, 중문학 거인이 남긴 학문의 자취
사람과 고전 사이, 중문학 거인이 남긴 학문의 자취
  • 이승엽 기자
  • 승인 2015.09.13 2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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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후배들, 지금 연구하는 사람들이 상을 받아야 하는데 엉뚱하게 나한테 돌아오니까 얼떨떨하더라고.”

올해 인문사회문학 분야 인촌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학주 명예교수(중어중문학과)는 소감을 묻는 기자의 첫 질문에 겸손하게 답했다. 올해로 29회를 맞는 인촌상은 인촌 김성수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상으로 6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룩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인촌상 운영위원회는 김학주 명예교수가 우리나라 중문학을 개척한 원로학자로 50여년간 독보적인 업적을 쌓아 인문학 발전에 이바지했다며 시상 이유를 밝혔다.

실제로 『시경』에서 시작해 『논어』 『맹자』를 거쳐 『노자』에 이르기까지 김 교수는 웬만한 중국 고전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단순 번역뿐 아니라 희곡 연구부터 중국문학사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중문학 분야가 없다. 이에 『대학신문』에서는 한국 중어중문학 연구의 기틀을 닦은 김학주 명예교수를 낙성대의 자그마한 그의 서실에서 만나 인촌상 수상 소회를 들어봤다.

▲ 김학주 명예교수가 현재 연구 중인 『송사』를 들고 있다. 송나라 역사와 문화를 정리해 저작을 남기는 것이 김 교수의 꿈으로 남아있다. 그는 "공자도 인(仁)이 정확히 뭔지 정의 내린 적이 없다"며 "읽는 이가 스스로 해석하고 좋은 것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 동양고전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博觀而約取, 厚積而薄發

두루 보되 요점을 취하며 두텁게 쌓되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
- 소동파, 『가설송동년장호』 에서 

 

따뜻한 가을 햇볕이 드는 노교수의 서재, 그곳에서 마주한 김 교수는 자신을 “전공이 없는 중문학자“라고 소개했다. 본래 그의 전공은 중국 전통 희곡이었다. 그랬던 그가 고전 번역 작업에 몰두하게 된 것은 처음 교편을 잡을 당시 학생들에게 가르칠 만한 제대로 된 중국 고전 번역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책도 없는데 고전을 읽으라고 할 수 없으니 내 전공은 아니지만 안 할 수가 없더라”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래서 그가 번역 작업을 할 때 항상 염두에 둔 것도 ‘쉽고 자세하게 쓰기’였다. 그는 “될 수 있으면 쉬운 말로, 주석도 현대적으로 자세히 달고 그래서 학생들이 선생님 없이도 혼자 읽을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으로 번역 작업에 임했다. 그렇게 시작된 고전 번역은 김 교수 평생에 걸친 과업이 됐다.

그의 노력은 단순히 동양고전을 우리말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알리는 데까지 나아갔다. 학교에 ‘고전연구회’ 동아리를 처음 만들었던 것도, 한국에 이른바 고전 읽기 붐을 일으켰던 것도 그였다. 이후 김 교수는 60년대 한국 자유교양추진위원회 부회장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대중을 상대로 강연했다. 바쁜 와중에도 그는 전공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당시 작성한 논문 「나례와 잡희-중국과의 비교를 중심으로」는 당시로써는 드물게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대만, 일본에서 번역돼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았다.

김 교수는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스스로 참 배짱도 좋았다”며 “지금 예전 번역을 읽어보면 낯이 뜨거워질 정도로 60년대에 내 실력이라는 게 오죽했겠느냐만, 전공을 넘나드는 연구를 하면서 본래 전공이던 희곡 연구도 풍부해지고, 동시에 중문학 전체에 대한 이해가 쌓였다”고 말했다.

 

靡不有初, 鮮克有終

어떤 일이라도 처음에는 어떻게든 해나가나 그것을 끝까지 해내는 자는 적다.
- 『시경』 에서

 

중문학 연구와 소개에 열정을 다했던 김 교수는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 중공군과 대면하면서 처음으로 중문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당시 중공군은 무기도 없이 사람만 많아, 깜깜한 밤에 총도 없이 몰래 접근해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작전을 썼다”고 회상했다. 김 교수는 나중에 포로로 잡힌 중공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한국이 군사작전부터 문화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너무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정도로 당시 우리는 이웃 나라 중국을 너무나 몰랐다”고 말했다.

이후 김 교수는 중국을 공부해 우리나라에 소개하겠다는 일념으로 당시 국내에서 유일했던 서울대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전란이 한창이던 부산의 천막에서 공부에 매진했고 졸업 후 국비 유학생 자격으로 대만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대만에는 장개석 총통이 중국에서 데리고 온 북경대학 출신의 뛰어난 교수들이 많았다. 당대의 석학 아래에서 배움의 뜻을 펴던 김 교수가 가장 열의를 가지고 들은 강의는 취완리 교수의 『시경』과 『서경』 강의였다. 『시경』과 『서경』은 『역경』과 함께 중국의 삼경(三經)으로 불리는데 요순부터 시작해 주나라까지 고대 중국의 시가와 정사를 담은 경전이다. 김 교수는 “조그마한 부락국가들이었던 중국이 처음으로 강한 하나의 나라가 되고, ̒한자̓를 쓰기 시작한 것이 주 문왕과 주공 시기”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천하라는 개념, 한족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도 『시경』과 『서경』이 쓰인 시기”라며 “현대의 중국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귀국 후 학교에서 관련 강의를 도맡으며 중국을 이해하는 시각의 깊이를 더했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번지가 인에 대해 여쭙자 공자께서,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논어』 에서

 

중국 전통에서 시작해 연구와 저술 활동에 매진하던 김 교수는 저서 『중국문학사』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중문학자가 됐다. 그는 이 책에서 기존 중국 주류 학계와는 다르게 북송시대의 문화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중국에서는 이백과 두보를 최고의 시인으로 본다”면서도 “하지만 이백과 두보의 시에는 ‘사람’이 없다”고 강조했다. “아름답기만 해서는 위대한 시가 될 수 없다”는 김 교수는 “북송 시대에 위정자로서 책임감을 자각하고 인간과 세상을 위해서 글을 쓴 소동파와 왕안석이 이백, 두보보다 위대한 시인”이라고 역설했다. 이어 그는 무력으로 중국을 강제로 통일한 한, 당의 정치보다 금과 싸우는 것을 피하면서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려고 했던 북송의 정치를 호평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중국 노학자들에게 비판받기도 했지만 젊은 학자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역사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인간을 향하는’ 관점에서 김 교수는 위나라의 조조를 재평가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조조를 뛰어난 위정자로 보는 시각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가 연구할 당시에 이는 생소한 관점이었다. 그는 “제갈량이 쳐들어오면 맞서 싸워야 하는데 조조는 우리 백성들도 죽는다며 성문을 꽉 닫고 싸우지 않았다”며 “조조는 백성을 생각하는 시들도 많이 썼다”고 말했다. 또 김 교수는 “지금의 한자체를 쓰기 시작한 것도 위나라일 정도로 조조 때부터 본격적으로 중국 전통문학이 발전하게 됐다”며 “스스로도 뛰어난 시인이었던 조조는 자기 이름을 밝히고 작품 활동을 시작한 첫 번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평생 사람을 먼저라고 생각하며, 중국의 이해 또한 ‘사람’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김학주 명예교수. 중문학의 불모지에서 평생 그 기초를 닦아온 그는 앞으로 백성을 먼저 생각했던 위나라, 송나라 시대의 역사와 문학을 연구하려 한다. ‘우리가 지금 중국 고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자 김 교수는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 그거 하나”라고 답했다. 전통 속에서 항상 사람을 찾고 그 길을 우리에게 열었던 노교수의 평생에 걸친 노력이 앞으로도 학계에 큰 울림으로 남길 성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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