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창문을 열고 무지갯빛 삐라를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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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수지 기자
  • 승인 2015.09.13 2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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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작은 목소리가 담긴 잡지들 - ③ 퀴어 잡지 「퀴어인문잡지 삐라」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의 불균등은 곧 담론의 불균등을 낳는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발언권은 충분하게 실현되는 반면, 사회적 약자는 이보다 훨씬 적은 발언 기회를 갖게되기 쉽다. 다수가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인식만이 사회에서 통용된다면 이들의 작은 목소리들은점점 더 묻히게 될지도 모른다.

과거부터 제도권 밖의 다양한 담론의 유통을 위해 노력해온 잡지들이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소수자의 시선, 다양한 삶의 모습, 그들에 관한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작은 목소리를 담아내온 우리 시대의 잡지들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③ 퀴어 잡지 「삐라」

 

“우리의 감수성을 다른 형태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캠페인식의 인권 주장보다, 어떤 위원회의 권고보다, 생전 처음 보는 ‘너’와의 만남이 아닐까”(‘미로의 안과 밖에서: 커밍아웃, 진출, 발화’). 퀴어인문잡지 「삐라」의 2호 「죽음」에서 필진 허원 씨는 감정에 호소하거나 몸으로 투쟁을 벌이는 것보다 성소수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지는 않은지 물음을 던진다. 이처럼 ‘네’가 접해본 바 없는 ‘나’의 깊은 생각을 보여줌으로써 개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근본적인 인식의 혁명을 일궈내는 이들의 목소리가 여기 있다. ‘퀴어인문잡지’라는 수식어를 달고 우리 곁에 살포시 착륙한 「퀴어인문잡지 삐라」(이하 「삐라」)의 표지를 넘겨본다.

▲ 현재 네 명의 편집위원이「삐라」3호를 준비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창간멤버 다제이 씨, 연경 씨, 이서하 씨, 그리고 새로 모집된 허원 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 ’를 날리다.

2012년 창간한 「삐라」는 복잡다단한 LGBT/퀴어* 담론을 한데 모아 담아내는 시도를 한 국내 최초의 ‘퀴어인문잡지’다. 창간멤버인 다제이 씨, 연경 씨 그리고 이서하 씨는 술자리에서 수다를 떨면서 함께 할 예술 프로젝트를 상의하던 중 ‘한국에서 LGBT/퀴어에 대한 깊이 있는 담론을 펼칠 공간이 필요하다’는 뜻을 모으게 됐다. 그리고 얼마 뒤 그 뜻을 현실화해 부정기간행물 「삐라」가 탄생하게 됐다. 2012년 8월에 출간된 1호 「연애」를 시작으로, 작년 6월에 2호 「죽음」이 출간됐고 내년 6월 3호가 나올 예정이다.

잡지의 이름인 ‘삐라’에는 해당 단어를 새로이 전위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편집위 다제이 씨는 “현재 성소수자는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여겨지던 ‘퀴어’라는 단어를 오히려 전유해 스스로를 긍정하는 의미로 쓰고 있다”며 “불온선전물이라 할 수 있는 ‘삐라’라는 단어를 한 번 더 비틀어 재밌게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름에서 보듯 「삐라」는 기존 한국사회에서 불온하게 여겨졌던 LGBT/퀴어 담론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단행본 혹은 여성주의 저널을 통해 LGBT/퀴어 담론이 단편적으로는 다뤄진 바는 있었지만, 학술적인 LGBT/퀴어 담론만을 다루고 한데 모으려 시도한 국내 매체는 현재까지 「삐라」가 유일하다. 연경 씨는 “국내에서 한글로 된 LGBT/퀴어 텍스트의 수요가 있지만 이에 대한 충분한 공급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느꼈다”며 한국 LGBT/퀴어 담론이 양적으로 성장할 기반을 갖출 수 있기 위해 「삐라」를 창간했다고 말했다.

「삐라」는 누구나 허락받지 않고서도 서로가 서로를 향해 의견을 자유롭게 날릴 수 있는 공간이다. LGBT/퀴어 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대해 깊이 사유해 학술적 글을 쓸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학위를 받은 전문가가 아니어도, 담론의 당사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필진이 될 수 있다. 다제이 씨는 “저널, 세미나, 학위논문, SNS 등 다양한 오픈 소스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직접 찾아 원고 문의를 드린다”고 밝혔다. 단독 편집장이 따로 없이 편집위원회가 함께 편집 과정에 참여하는 것도 이 잡지의 특징이다.

 

넓이를 더해가며 성장하는 담론

LGBT/퀴어 담론은 1980년대 말 처음 이론적으로 대두돼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지녔지만 나날이 변화를 겪고 있다. 기존 담론에서는 성소수자와 이성애자의 대립구도로써 발생하는 차별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컸다면, 담론이 세분화된 현재는 LGBTIAQ** 각각이 가진 맥락의 차이를 무시하고 ‘한 뭉텅이로 퉁치는’ 시각에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각각의 정체성이 가지는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퀴어라는 용어가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필진 제제 씨는 ‘비이성애자 집단 내의 차이를 감추는 것과 동일한 효과가 생길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한 바 있다(출처:‘자주 흔들리더라도 무너지지 않고-퀴어&정체성에 헌신하기’). 다제이 씨는 “인터넷의 발달로 SNS와 같은 담론이 펼쳐질 매체가 늘어나면서 필진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와 명칭이 섬세하게 정의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LGBT/퀴어 담론을 한층 다면적으로 다뤄야함을 말해준다. 실제로 「삐라」는 갈수록 비대해지는 LGBT/퀴어 담론을 한데 모아 다양한 층위에서 섬세하게 다뤄보려 시도한다. 철학, 문화 비평 및 분석, 정치, 법학, 사회학까지 「삐라」가 아우르지 못하는 학문 분야는 없다. 각 호의 추상적인 제호는 각각의 분야에 맞는 방향으로 변주되고 해석됐다. 2호 「죽음」에서는 ‘생을 마감한다’는 의미에서 벗어나 성소수자 관련 법과 제도에서 성소수자 고유 ‘맥락’의 죽음을 논하며(출처:MECO, ‘법 앞에서 맥락의 죽음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성소수자 맥락의 죽음이라는 판결에 관한 세 개의 의견’), 레즈비언의 삶이 죽어있는 모습으로 재현되는 한국 현대 소설을 비판하는 목소리(출처: 이보배·한빛나, ‘새삼, 새 삶의 복원: 한국 현대소설을 통해 본 레즈비언 관계 정치학’)를 담았다.

학문 분야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과 더불어 잡지에서 다루는 대상에 있어서도 다양화를 추구한다. 이서하 씨는 “무성애에 대한 담론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죽음」에 외국의 무성애자 관련 글을 번역해 싣기도 했다”고 밝혔다. 마크 캐리건이 작성한 ‘섹스 이외의 삶에 관하여: 무성애자 공동체 내부에서의 차이와 공통성’이라는 글은 무성애자 공동체 내부의 다양성과 그 다양성을 촉진시키는 저변의 공통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편 부정기간행물 「삐라」는 금전적 문제로 인해 정기적으로 잡지를 내지 못하는 대신 담론의 깊이와 질적 향상에 초점을 맞춘다. 다음 출판까지 걸리는 긴 기다림의 시간은 오히려 필자로 하여금 충분히 숙고하고 원고를 집필할 수 있게 한다. 「죽음」에 실린 ruin 씨의 글(‘죽음을 가로지르기: 트랜스젠더, 범주, 그리고 시간성’)은 2010년 5월, 12월, 2011년 8월을 거쳐 2012년 11월 초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몇 건의 트랜스젠더의 죽음과 이에 대한 세간의 반응을 살폈다.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에 시선이 주목돼 정작 그의 ‘죽음’이 가려지는 현상을 시간의 축을 가로지르며 살펴본 이 글은 ‘트랜스젠더에게 과연 ‘죽음’은 가능한 것인지’와 같은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독자 최홍범 씨(언어학과·14)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인식을 죽음과 연관 지어 쓴 글이 트랜스젠더에 대한 시각을 돌아보도록 했다”고 전했다.

▲ 2호「죽음」의 표지 색깔을 짐작할 수 있는 팬톤 컬러칩이 1호「연애」위에 올려져 있다. 연경 씨는 "서하 씨가 글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바로 표지 색깔이었다"고 말했다.

 

메마른 동토에 담론의 싹을 틔우다

지면을 통해 내용을 전달하던 전통적인 잡지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웹진으로의 변모를 꾀하는 시점이지만, 학술지로서 굳건히 자리 잡기 위해 「삐라」는 지면 발간을 고수한다. 연경 씨는 “국내 LGBT/퀴어 담론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인용 횟수 증가가 필요하기에 학술지를 웹진 형태가 아니라 지면으로 발간한다”고 말했다. 지면 발간과 더불어 각각의 원고를 인터넷 학술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하기도 한다. 이는 보다 많은 사람이 해당 담론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서하 씨는 “앞으로 더 많은 한글 텍스트의 생성을 위해 일본, 중국, 태국 등 가까운 아시아의 LGBT/퀴어 담론을 번역해 지면에 담을 것”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잡지는 아니지만 「삐라」는 한국 LGBT/퀴어 담론에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윤민정 씨(정치외교학부·15)는 “타인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글을 통해 시도할 수 있을 것이고 간혹 풍부한 누군가의 내면을 엿보고 젖어들 때가 있다”며 “「삐라」를 읽는 것이 그렇다”는 감상을 밝혔다. 누구나 말하고 들을 기회를 제공하는 「삐라」는 이성애 중심주의 사회의 견고한 동토를 조용히 녹여내며 누군가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싹을 틔워내고 있다.

 

*「삐라」는 성소수자를 언급할 때 ‘LGBT’와 그 외의 비규범적인 양태들을 ‘퀴어’로 아울러 ‘LGBT/퀴어’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본 기사에서는 「삐라」의 표기법을 따랐다.

**LGBTIAQ : 기존의 LGBT에 양성의 생물학적 특성을 같이 지니는 간성(intersexual), 성적 끌림을 경험하지 않는 무성(asexual), 성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퀘스쳐너리(questionary)를 더한 개념

 

사진(위): 유승의 기자 july2207s@snu.kr

사진(아래): 퀴어인문잡지 삐라

삽화: 최상희 기자 eehgna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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