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강제동원 시설, 지금, 여기의 역사를 만나다
한반도 강제동원 시설, 지금, 여기의 역사를 만나다
  • 이설 기자
  • 승인 2015.09.13 2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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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5일 군함도 등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일본 측이 이례적으로 1940년대 한국인의 강제노역을 인정하며 한국과 합의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후 일본은 ‘강제노동’이라는 표현을 ‘일하게 됐다’ 정도로 번역하고 “징용이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히는 등 말을 바꿨다. 일본이 근대 산업화의 역사만 화려하게 조명하고 여기에 함께 얽힌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는 지우려 한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번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강제동원의 어두운 역사를 일깨웠지만 이와 관련된 시설물과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은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해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국내의 강제동원 시설은 8,000여 곳, 국내에서 동원된 인원은 연인원 650만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시설은 도시 외곽에 있고 문화재로 관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광복 70주년을 맞은 오늘날까지 오랫동안 방치돼온 것이 현실이다. 식민지의 아픈 역사를 증언하는 이 유적들이 무슨 연유로 잊히고 사라지게 됐을까. 어느샌가 공동체의 기억에서 지워진 일제 강제동원 시설과 군사시설, 그곳에서 여전히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대학신문』이 만나봤다.

여행을 떠나며

단순한 이유에서 출발한 여행이었다. 국내의 일제 강제동원 시설과 군사 시설이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곳은 도로를 확장한다고 잘려나갔고 또 다른 곳은 아파트 공사에 박살이 났다. 장소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 수는 해외 강제동원 피해자의 5배에 달하지만 언론의 관심도 정부의 보상도 주로 해외 피해자에 쏠렸다. 중요한 우리 역사가 잊히고 사라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무작정 여행을 계획했다.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직접 보고 지금도 그 언저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부산 가덕도 외양포 - 박제된 마을과 역사

‘100년 전의 시간이 그대로 정지한 마을.’ 부산광역시 가덕도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 외양포에 다녀온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다소 비탈진 터에 자리 잡은 마을에는 한 눈에 봐도 독특한 가옥들이 곳곳에 있다. 세모꼴의 기다란 지붕을 놓은 집들이 많은 가운데 지붕에 기와를 올리고 외벽에는 여기저기 함석을 덧댄 낡은 목조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때 일본군의 무기창고로 쓰였던 이곳은 외양포 이장 이성태 씨(61)의 집이다. 100여년 전 외양포는 일본군 포병부대가 주둔했던 군사요새였다. 오늘도 주민들은 일본군 막사, 무기창고, 위병소였던 건물에서 여전히 살아간다.

이성태 씨의 안내에 따라 마을 뒤편 산기슭에 있는 일본군 포대진지 유적을 찾았다. 입구에는 ‘1905년 편성 명령을 받고 외양포에 상륙했다’고 쓰인 기념비가 서있다. 일본군은 러일전쟁 당시 함대를 포격하기 위해 여러 문의 대포를 이곳에 설치했다. 대포는 남아있지 않지만 포가 놓였던 자리와 방음장치 역할을 했던 움푹 들어간 벽 공간, 진지를 위장하려고 만든 높은 제방과 대나무숲은 거의 그대로 보존돼있다. 탄약고와 작전상황실, 대피시설로 추정되는 콘크리트 건물도 당시의 규모와 견고함을 자랑하며 건재하게 남아 있다. 시간이 멈춘 것은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여기는 아직도 일제시대’라고 말할 정도로 외양포가 먼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것은 이곳이 줄곧 국유지이자 군사시설 보호구역이었기 때문이다. 국유지 개발 제한에 따라 건물의 신축·개축이 금지돼 주민들은 ‘일본군 막사에서 손도 보도 못한 채로’ 살아야 했다. 1904년 일본군에 강제로 쫓겨났던 주민들은 해방이 되자 마을로 돌아왔지만 그 후에도 수십 년간 온전히 자기 땅을 갖지 못했다. 땅의 소유권이 없었던 까닭에 마을을 떠날 수도 없었다. “땅이 내 땅이 아니니까 땅 팔면 돈이 되나, 건물이 가치가 있나. 돈이 있어야 방 한 칸이라도 얻어 나가는데 그런 처지가 안 되니까 여기서 그냥 산 거지”라는 이성태 씨의 말에서 쓴 세월이 물씬 묻어났다.

▲ 기자의 취재에 응하고 있는 외양포 이장 이성태 씨(61)

최근 들어 포진지를 보러 마을을 찾는 사람이 늘어난 것도 주민들에게 그다지 희소식은 아니었다. 건물의 신축과 개조가 불가능한 외양포에는 숙박업이나 요식업이 발달할 수 없었다. 관광상권이 없는 외양포 마을에 외부인의 방문은 고스란히 주민 불편으로 돌아왔다고 이성태 씨는 말한다. “장사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들어와야 돈을 버니까 좋아하지. 차 들어오고 먼지 날리고 쓰레기 버리니 사는 사람은 싫어한다고.” 생필품을 사러 육지에 나가려면 하루에 한 번 들어오는 여객선만 바라봐야 했던 곳에 이제 매점이 생겼고 마을버스가 다닌다. 하지만 여전히 개발 제한에 묶여 노인이 대부분인 이 마을에는 경로당 하나 없다. 우연히 100년 전의 모습 그대로 남게 된 이곳이 공동체의 역사를 기억하는 장소가 되게 하는 한편, 70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주민들의 신산한 삶을 보듬을 수는 없을까.

 

여수 돌산읍 평사리 - 그 커다란 대포는 어디로 갔을까

책에서 보고 말로만 들은 장소를 찾는 길은 막막했다.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해안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도로와 낙석방지 철조망뿐이었다. 30여 분을 헤매다 만난 ‘한려횟집’ 주인 박기식 씨(70)는 우리가 찾는 대포굴이 그 철조망 뒤편에 있다고 했다. 박 기식 씨가 일러준 지점에는 철조망 일부를 끊어 만든 개구멍이 있었다. 좁은 틈새에 가까스로 몸을 구겨 넣어 통과하니 가시덤불과 풀숲 사이로 정말 커다란 굴이 보였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벙커형 구조물 안에 대포가 놓여있었다 해서 대포굴이라고 불리는 여수시 돌산읍 평사리의 두릉개 대포굴을 그렇게 찾았다.

▲ 박기식 씨(70)가 기자에 질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혀 관리가 안 돼. 나쁜 놈들이야. 팻말이라도 하나 걸어두면 좋을 건데 아무도 관심이 없어. 가끔 기자들이나 와서 찍어가지. 해방된 지가 70년인데 누가 신경을 쓰겠어?” 대포굴이 방치된 내력에 대해 물어보자 박기갑 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인근에서 나고 자라며 어느 날 대포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도로가 확장될 때 굴이 반토막 나는 것을 지켜본 산 증인이다. ‘TV에서 본 2차 대전 때 독일군 대포만큼’ 큰 대포가 설치됐던 대포굴은 마을의 노인들과 지역의 연구자만 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잊힌 유적이었다. 철이 귀하던 시절 대포는 고철로 팔려나갔고 대포 없는 텅 빈 포대는 개발에 밀려 보이지 않는 곳에 버려졌다.

평사리는 일본군 중포병연대가 배치됐던 곳이다. 대포굴도 당시 이 일대에 구축된 여러 개의 포대 중 하나다. 한려횟집을 지나 고개를 넘어 계동마을에 다다랐다. “여기서 전부 앞으로는 일본군들이 막사를 지어가지고 1개 연대가 주둔해 있었어. 부락민은 건너가지도 못해. 저기 전부 포가 있어가지고.” 박갑진 씨(80)는 중포병연대 본부가 있었던 터에서 오랫동안 횟집을 운영해온 토박이로 그때의 마을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일본군에게 땅을 뺏긴 지주들이 많았고 주민들은 각종 부역에 수시로 동원됐다. 사람이 겨우 지나던 흙길을 차가 다니는 도로로 넓히고 굴을 파고 포도 설치하게 시켰다.

▲ 오랫동안 평사리에 살아왔던 박갑진 씨(80)

강제징용 이야기를 들려주던 박갑진 씨의 표정이 돌연 굳어졌다. “지금 사람들은 느끼지를 못하지마는 그이들이 못할 일 많이 했네. 얼마 전에 징용 끌려간 중국인들한테는 사과를 했지 않아. 한국은 더하면 더해 놓고도 사과도 하지 않아.” 그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반성 없는 태도를 강한 어조로 성토했다. 박갑진 씨가 하는 말의 내용은 언론에서 항상 들었던 것이었지만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아마 “지금 사람들은 느끼지를 못하지마는”이나 “자네들 생각은 어떤지 몰라도” 같은 표현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교과서로 공부한 강제동원이나 위안부 문제는 어쩌면 이 노인에게 제 가족과 친척, 친구가 겪었던 어제처럼 생생한 일일지도 몰랐다.

 

전남 해남군 옥매광산 -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118명의 죽음

전남 해남군 황산면과 문내면 가운데에 위치한 옥매광산은 일제 시대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돼 명반석을 채굴했던 곳이다. 명반석은 탄약과 폭탄, 전투기 제조 등에 중요하게 쓰인 알루미늄의 원료다. 일제는 1945년 3월 옥매광산 광부들을 제주도로 끌고가 이들의 굴착기술을 이용해 진지동굴이나 해안동굴 등 군사시설을 구축했다. 고되고 위험한 노역에 시달렸던 그들은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지만 이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귀향은 출항한 배가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로 침몰해 118명이 수장되고 104명만이 고향 땅을 밟는 것으로 끝났다.

▲ 옥매광산 광부 유족회 회장 박철희 씨(60)

이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는 유족회 회장이 박철희 씨(60)다. 그의 할아버지는 침몰한 배에서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온 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박철희 씨는 합동 제사를 지내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념공간을 만드는 일에 수년째 온 힘을 쏟고 있지만 아직도 변변한 추도비 하나 세우지 못했다. 정치권과 언론은 선거철이나 큰 행사가 있을 때 반짝 관심을 가질 뿐,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희생자와 유가족의 한을 달래는 일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이는 드물었다. 유족들이 바라는 것은 사고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죽은 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나까지 하면 3대여. 손주가 있으니 5대까지 내려와버린 거여. 나라에서 보상하면 5대까지 얼마를 해주겠어? 보상 필요 없다 이거야. 집안싸움만 나고. 그래서 위령비라도 세워주라는 거야. 위령비라도.”

2012년에는 군청까지 찾아가 군수와 면담도 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참다못한 유족들이 6, 7년 전부터 농한기를 이용해 옥매광산 주변에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 118명의 숨진 넋을 기리기 위해 돌탑 118개를 목표로 해 지금까지 102개를 만들었다. 하지만 기자가 위령탑이라고 할 때마다 박철희 씨는 거듭 “위령탑이 아니라 돌무더기”라고 고쳐 말했다.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위령비를 세워주기 전까지는 아무리 공들여 쌓아도 이 돌탑들은 돌더미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우리 선조들이 강제로 끌려가서 바다 한가운데서 죽었다. 이걸 어디다 항변할 거여?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는 건 공기하고 물하고 똑같은 거여. 사는 데 산소가 필요한 거 만치 기본적인 거여.” 박철희 씨가 희망하는 것은 단순하다.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들어간 위령비를 나라에서 건립하는 것. 이를 위해 옥매광산 광부들을 동원했던 아사다 공업으로부터 당시의 노동자 명부를 받아내려 하나 이 또한 개인의 힘으로는 어렵다. 식민지 시대가 낳은 비극적인 사건을 사회적 차원에서 기억하자는 소박한 소망은 수십 년 동안 응답받지 못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는 일을 공기와 물처럼 절박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지난달 29일 마을에서 열린 희생자 합동추모제를 전후로 옥매광산의 역사가 다시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해남군수를 비롯한 지역 정치인이 대거 추모제에 참석했다. 오랫동안 불투명했던 추모비 건립 계획은 8월 말 해남군청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유족회는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역신문과 함께 군민성금 등을 모금해 추모비 건립을 추진할 계획이다. 동원 피해자의 명단을 확보하는 등 난제가 남아있고 지자체의 계획도 구체화되지 않아 여전히 많은 관심이 요구된다.

 

죽은 과거가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다

서슬 퍼런 강제동원의 현장에서 생존자들의 절절한 증언을 듣는 것을 기대했던 이 여행에서 기자가 만난 것은 이 땅의 평범한 노인들이었다. 외양포의 이성태 씨는 하루에 단 한 번 배가 들어오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에서 주민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고 있다. 한려횟집 주인 박기식 씨는 등산을 좋아 했기 때문에 대포굴을 비롯한 주변 역사 유적들을 전문가보다 더 잘 알게 됐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포병연대 자리에서 박갑진 씨는 수십 년 동안 횟집을 운영하며 사람들에게 마을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철희 씨는 공무원직에서 은퇴하고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희생자들의 추도비를 세우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닌다. 70년도 더 지난 역사는 세월의 풍화를 피할 수 없었지만 일부는 여전히 이들의 삶 속과 말 속에 살아있었다. 역사를 기억하는 첫걸음은 죽은 과거를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역사와 만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 장유진 기자 jinyoojang03@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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