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이종건 기자 jonggu@snu.kr

확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마흔다섯 개의 숫자 중 서로 다른 여섯 개의 숫자가 선택될 확률은 814만 5,060분의 1. 그렇다. 짐작대로 45 팩토리얼로 6 팩토리얼과 39 팩토리얼을 곱한 수를 나누었을 때 산출되는 이 거추장스러운 숫자는 로또에 당첨될 확률이다. 수고를 좀 더 들여서 여섯 개의 숫자 대신 여섯 단어가 일치할 확률적 가능성도 따져보기로 하자.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표제어의 수는 약 51만개. 그렇다면 대략적으로 51만 팩토리얼로 6 팩토리얼과 50만 9,994 팩토리얼을 곱한 수를 나누면 나오는, 그야말로 우리에게 아주 생소한 어떤 숫자가 바로 그 확률에 해당된다. 거칠게 따져본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로또 맞는 것’보다 훨씬 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여섯 단어 이상의 연쇄 표현 일치 여부를 논문 표절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이와 같은 확률적 판단에 근거한다. 확률상 발생가능성이 극히 낮은 수준이라면 그것은 이미 우연성을 초과해 필연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짐작. 바꿔 말하면 우리가 표절 행위라고 부를만한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있으리라는 추정인 셈이다.

최근 어느 계간지에서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논란에 대해 “의도적 베껴 쓰기”가 아니라는 변호 입장을 제출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공분했고 잠시 잠잠했던 문단과 여론은 금세 다시 어수선해졌다. 소설가의 의도는 객관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차원인 만큼 이럴 때 우리가 거론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우연과 필연 사이를 가르는 수학적인 확률뿐이다. 그러니 만일 그들이 변호한대로 이번 문제가 의도하지 않은 “문자적 유사성”에 불과한 것이라면 신경숙의 「전설」과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 사이에서 발견된 여섯 단어, 아니 일곱 단어의 연쇄적인 일치는 실로 엄청난 확률의 ‘우연’이라고 할 밖에.

한편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건을 두고 신경숙의 오랜 글쓰기 수련 방식을 탓하기도 했다. 이 소설가의 습작시절이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과 같은 수작들을 필사하는 작업으로 채워졌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무릇 위대한 문장들은 매혹적이고, 사랑의 연장선상에는 닮음이 놓여있는 법.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를 탐독하다 보면 부지중에 그의 문장에 물들어가는 흔적들이 발견되곤 한다. 그럼에도 자기만의 문장이란 베껴 쓰기와 같은 손쉬운 행위가 아닌, 스스로 거듭 고쳐 쓰고 다시 쓰는 분투 가운데 얻어져야 할 무엇이다. 그것의 무늬와 결은 오랜 시간 동안 쓸리고 깎이고 공들여 새겨지는 가운데 선명해진다. 일찍이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시작 부분을 적어도 쉰 번은 다시 썼다고 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소설 전편을 강물처럼 흘러가는 그의 문장은 그렇게 탄생했다.

처연하거나, 처연하게 아름답거나. 남의 문장을 흉내 낸 미문(美文)의 말로는 고작 이런 것이다. 이번 표절 사건이 이를 새삼 다시 한 번 주지시켜 주었다. 게다가 그 처연한 아름다움마저도 알리바이처럼 의심스럽거나 악몽같이 불길한 것일 테니 그럴 바에야 아름답지 않은 편이 낫다. 다시 헤밍웨이에게로 돌아가보자. 그가 말하길, 문체란 “작가가 어떤 사실을 진술할 때 드러나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어색함”이다. 문장의 근본은 진부한 아름다움에 있지 않고 그 고유의 어색함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한 위대한 소설가의 가르침을 가만히 곱씹어 본다.

배하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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