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사로잡은 테러 공포 증후군

내가 공부하고 있는 대학의 학생들이 가장 즐겨 찾는 까페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오사마’다. 이름만 오사마가 아니라, 까페주인도 아랍계고, 기로라는 아랍식 양고기 샌드위치를 팔며, 커다란 간판에는 터번을 두른 램프의 요정이 접시를 들고 빙그레 웃고 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9·11 테러 직후 이 까페는 한달 정도 문을 닫았어야 했고, 그 이후에도 한동안 가게 앞에 커다란 성조기를 내걸고 ‘We love America’라는 글귀를 써붙여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게 유리창이 깨지는 수난을 피하지는 못했고. 1주년이 된 무렵에도 철부지 대학생들은 그곳을 지나가면서 알아듣지 못할 욕을 쏟아붓곤 했다.

 
9·11이후 미국인들이 이방인, 특히 아랍계 이주민들과 유학생들을 보는 시각이 고울 리는 없다. 테러범이 바로 유학생들이었고, 부시정부가 후세인 정부의 생화학무기 개발을 주도했다고 지목한  이라크의 고위 관료도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의 화학과 대학원 출신이었다. 9·11테러 이후 도입된 사회통제 시스템은 애국법(Patriot Act)으로 대표되지만, 나 같은 외국인 유학생들이 체감할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출입국 통제를 비롯한 유학생 관리일 것이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유학생 정보 시스템(SEVIS)은, 나 같은 ‘힘없는’ 인문사회계열, 그것도 동북아 출신의 유학생들은 공항에서 받는 아주 특별한 대우와 기존의 출입국 서류를 갱신해야 하는 번거로움 정도로 넘어갈 수 있으나, 아랍출신으로 ‘위험’할 수 있는 공학이나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유학생들에게는 매서운 감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새로운 사회통제시스템의 도입으로9·11 이후 변화된 미국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평범하고 조용한 삶을 살아가던 대다수 미국인들이 받은 충격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명시적 반응에 불과하다.

테러 이후 사회통제 강화 , 후유증 당분간 지속될 듯

일상의 변화를 들여다 보자면, 워싱턴 근교의 연쇄 저격 살인에서부터 시카고 나이트 클럽 화재, 뉴욕시 청사에 대한 총격, 최근의 북동부 지역의 대규모 정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알리는 속보의 시작은 항상 테러 가능성에 대한 검토로 시작되며, 담당 경찰들도 그 가능성을 배제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물론 미국인들의 관심이 가장 집중되는 것도 테러와의 연관성이며, 테러가 아니라는 확정 발표가 있어야 비로소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게 된다. 나 같은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호들갑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과민반응은 매스 미디어에 의해 과장된 측면도 없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9·11 이후 미국인들이 빠져든 정신적 공황상태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미국인 친구의 탄식처럼, 그 혼돈스러운 심리상태의 기저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슬픔이나 분노, 정의와 같은 수사가 아니라, 바로 거대한 ‘공포’이다. 더군다나 그 공포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억지스러울 정도로 구체적이다. 라스베가스의 유명세 덕분에 나도 알긴 하지만, 네바다는 황량한 고지대와 사막으로 이루어진, 인구도 200만이 채 안 되는 외진 곳이다. 나의 한 미국인 친구는 그 네바다에서도 인구 2000이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 따르면, 단지 그 마을 근처에 공군 기지가 하나 있다는 이유로, 9?1 이후 그곳 사람들은 테러의 공포에 시달렸다고 한다.


미국 국가는 “home of the brave”라는 소절로 끝을 맺고 있지만, 마이클 무어는 다큐영화 ‘Bowling for Columbine’에서 미국을 “공포에 저당 잡힌 겁쟁이들의 사회”라고 비꼬았다. 피습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미국인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중화기들을 사재고 있으며, 통제되지 않는 총기들은 더 큰 두려움을 만들어 내는, 그런 악순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9·11 테러공격은 미국인들이 이전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고, 그로 인한 정신적 외상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또한, 김정일의 지령에 따라 활동하는 스파이가 미 서부지역에만 50만 정도 암약하고 있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위협들을 1면 톱으로 떠벌이는 타블로이드 신문들과 이라크에 핵무기가 그득하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되는 라디오 토크쇼들이 넘쳐나는 한, 미국인들은 그 충격과 공포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 이라크 상황이 악화되면서, 몇몇 방송국들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을 다시 꺼내 쓰고 있기도 하다.


부시대통령이 이라크전의 종전선언 이후, 아랍의 가장 극단적이었던 두 나라를 해치웠으니 이제 좀 안심이 되냐고, 그나마 말이 통하는 극성 민주당 지지자 친구에게 물어봤다. 그는 미국으로 들어오는 선박화물의 90% 이상이 최소한의 검역도 거치지 않는 상황에서 명분 없는 전쟁은 군수산업만 살찌우고 테러위협은 오히려 더 증가시켰다고 대답했다. 또한 부시정부의 카우보이식 외교정책이 악의 축이며 이를 폐기하는 것만이 근본적인 처방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이방인으로서 또 다른 ‘악의 축’을 옆에 끼고 사는 한국인으로서, 민감한 문제는 미국인들의 공포뿐  아니라 그것이 통제되고 발산되는 방식일 것이다. 2년 여가 지나면서 표면적인 공포와 경계는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지만, 지난 중간 선거 결과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앞으로 14개월 후면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또 다른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선택 앞에, 근본적으로 중동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테러 위협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는 없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을 것 같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 선거라는 말도 그냥 삼키고 말 것 같다. 단지 나는 그 선택이 다른 쪽 세계에 사는 이들에게도 조그마한 평화를 가져다 줄 선택이길 바란다. 며칠 전 ‘가디안’의 칼럼니스트가 꼬집었듯이, 세계 평화를 위해 미국인들만이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일이 슬슬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송현주
미국 미주리 주립대 저널리즘 스쿨ㆍ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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