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로 가득 찬 일산을 지나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도로 옆 ‘서울대 약초원’라고 쓰인 작은 푯말을 만날 수 있다. 연구동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우거진 수풀 뒤에 아름다운 식물원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엔 푸른 풀밭 위에 식물들이 말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12일(토), 약대 신입생들은 처음 약초원을 방문해 견학하는 시간을 가졌다. 실습실에서만 봤던 약초들을 실제로 마주한 학생들은 신기한 듯 나란히 서있는 약초들을 주시했다. 조교들은 익숙한 둥굴레, 가시엉겅퀴, 쑥부쟁이에서부터 조금은 생소한 갯기름나물, 맥문동까지 표본에 간략한 설명을 더하며 학생들의 견학을 도왔다.

엄숙한 식물원일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약초원은 단순히 연구소가 아니라 자연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문화시설이기도 했다. 유치원생들과 초등학생들도 견학을 오면 이곳에서 평소에 볼 수 없던 다양한 수목들을 만날 수 있다. 이날 신입생들과 함께 했던 약초원장 김진웅 교수(약대)는 “약초원은 무료로 개방돼 경기도 시민들에게 자연을 소개하는 지역사회 공헌에도 힘쓰고 있다”고 전했다.

약학 연구의 뿌리 깊은 나무

▲ 사진1. 표본포에서 약대 신입생들이 조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약초원이 처음 문을 연 것은 60년 전이다. 지금과 달리 신설동의 작은 부지에서 시작된 약초원은 여러 번의 이전을 거쳐 1995년 지금의 고양시에 자리를 잡게 됐다. 800평에서 1만평으로 크기가 커진 만큼, 보유 식물 종류도 150종에서 1,300여종으로 늘어났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식물이 3,300여종이라고 하니, 약초원은 가히 한국 식물 세계의 축소판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김 교수는 “외국 분들도 방문하시고 깜짝 놀랄 정도로 서울대 약초원은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며 “우리 학교뿐 아니라 타 대학 약대, 한의대에서도 자유롭게 약초원을 방문하고, 이곳은 한국 약학 연구의 기반시설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대규모 약초원을 운영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고양시 외에도 약초원은 파주와 시흥에 자연 수목림과 대량재배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세 곳의 커다란 약초원을 단 2명의 직원이 관리하고 있다. 한상일, 민필기 주무관은 표본의 재배와 수목림 관리, 견학생 교육까지 약초원의 관리를 도맡고 있다. 한상일 주무관은 “약초원은 학교 내 기관이라 수익 사업을 못하게 돼있다”면서 “제한된 예산으로 운영하기 빠듯하지만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어려움에도 학교 차원에서 대규모의 약초원을 운영하는 이유는 약초원이 신약후보물질을 개발을 위한 연구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약초원은 약초 연구를 위한 체계적인 환경을 제공해 정확한 연구와 기록을 돕고 있다. 이를 통해 연구자는 약초가 어떤 환경, 어떤 기후에서 자랐는지 파악하며 자료의 객관성을 보장받는다. 또 약초원은 다양한 종의 식물 확보를 가능하게 한다. 식물의 다양성 확보는 약학 연구에 중요한 원천 자원을 확보하는 일과 같다. 이에 약초원은 여러 동의 온실을 운영하며 남부지방과 제주도에서 자라는 약초와 초목까지 보존하고 있다. 김현우 씨(약대 박사과정)는 “온도 관리를 통해 추운 북부지역의 날씨를 견딜 수 없는 식물들까지 보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은 약초가 필요할 때마다 굳이 산 속을 헤맬 필요 없이 약초원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식물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다.

특히 2012년 나고야 의정서 이후로 식물 다양성 보존은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의제다. 한상일 주무관은 “지난해 환경부는 약초원을 식물다양성 관리기관으로 선정했다”며 “그만큼 약초원은 천연 자원 확보를 통해 생물 보존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금도 약대 연구원들은 주기적으로 지리산 학술림 등을 찾아 숨어있는 약초들을 채집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이 곳에서 채취한 새로운 약초는 약초원으로 옮겨져 체계적 관리 아래 재배된다. 한상일 주무관은 “1년에 10편 이상의 박사 논문이 약초원에서 재배된 표본들에서 나온다”며 “아직 약초원에는 연구되지 않은 새로운 약초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숨은 천연물 그림 찾기

▲ 사진2. 연구원이 식물 시료를 박층 크로마토그래피에 도포하고 있다.

약초원에서 재배된 약초들은 연구자들의 필요에 따라 대량으로 재배돼 약대 연구실에서 쓰인다. 약초원 방문 후 며칠이 지난 17일, 연구실에서는 대학원생들의 연구가 한창이었다. 생약학 연구실은 성상현 교수(약대)의 지휘 아래 채취한 식물들의 성분을 주로 연구하고 있었다. 식물들로 가득 차 초록빛을 띄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생약학 연구실은 여느 연구실과 마찬가지로 첨단 장비와 실험관으로 가득했다.

생약학 연구실의 연구는 천연물의 성분을 알아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연구원들은 약초원에서 도착한 식물들은 쉽게 분석할 수 있도록 식물을 녹이는 용매에 넣어 액체화한다. 액체화한 식물 시료를 박층 크로마토그래피(Thin Layer Chromatography, TLC)에 도포하면 대략적으로 식물에 어떤 성분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TLC는 하얀 종이처럼 생긴 용지로, 여기에 시료를 떨어뜨리고 흡수를 도와주는 실리카겔* 같은 전개용액에 담그면 시료가 종이를 따라 위로 올라가며 식물이 어떤 성분으로 이뤄져있는지 표시해준다.

이후 연구원들은 보다 정밀한 분석 작업에 돌입한다. 증류기를 이용해 시료에서 용매를 제거하고 살균작업을 거쳐 천연물의 성분이 추출된다. 연구원들은 성분을 농축시킨 뒤 여러 가지 세밀한 분석을 통해 천연물의 성분이 가지고 있는 효과를 분석한다. 이 천연물이 인체에 효능이 있는 성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표준화 작업과 임상시험을 통해 신약이 개발된다.

특히 생약학 연구실에서는 우리나라 특산식물들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실제로 신약후보물질을 찾기 위해 생약학 연구실에서는 우리나라의 『동의보감』, 중국의 『본초강목』 등 옛 의서를 참고하기도 한다. 김미송 씨(약대 석사과정)는 아직 연구가 돼있지 않은 섬개불나무라는 우리나라 자생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김 씨는 “생약학 연구실에서는 인삼, 자작나무, 고사리 등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식물들의 연구가 한창”이라고 전했다. 아직 연구되지 않은 약초들도 많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토종식물에 집중하는 건 토종식물로 신약을 개발할 경우 원료 자원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크기 때문이다.

인간과 미지의 식물의 만남

▲ 사진3. 호그와트 약초학 교실을 연상케 하는 약초원 한약표본포의 신비로운 모습. 약초원 구석구석에는 독특한 식물들이 모여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 사는 식물은 왜 스스로 효능이 있는 천연물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생물은 환경이나 기후가 변하면 그에 적응해서 생존한다. 동물은 환경이 급격히 변해 생명에 위협을 느껴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그곳을 떠나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떠난다. 반면 발이 없는 식물은 스스로 생존의 방법을 모색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자기 몸 안에 혹독한 환경을 견딜 수 있는 ‘2차대사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약학은 이 2차대사산물 중에서도 인간에게 이로운 천연물질을 찾아 약물로 만든다. 특히 천연물로 만든 신약은 자연에 없는 물질로 만든 합성신약보다 안전하고 인체에 부작용이 적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연구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높은 안전성은 임상시험의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에 개발 비용도 절감시키는 효과가 있다. 김현우 씨는 “생약학 연구실의 연구 기조는 ‘천연물의 약물화’”라며 “아스피린, 항암제 등 현재 많이 사용하는 약제도 사실 천연물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생약학 연구실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개발한 위장약, 건강기능식품이 상용화 돼 국민의 건강 증진에 점차 보탬이 되고 있다.

21년간 약초원장을 맡으며 지금의 약초원을 있게 한 전임 원장 김영중 명예교수(약대)는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모든 식물은 약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연구만 안 됐을 뿐이다.”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아직 연구되지 않은 수많은 약초들이 연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약초원의 연구원들은 좀 더 좋은 약을 만들기 위해, 아직 그 쓰임새를 찾지 못한 숨어있는 식물들을 찾아 산과 들에서, 약초원에서, 그리고 연구실에서 지금도 쉼 없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약초원은 천연신약 연구의 출발점이자 다양한 식물을 보존하고 터전으로서의 역할을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실리카겔: 황산과 규산나트륨의 반응에 의해 만들어지는 입자. 표면적이 넓어 물이나 알콜을 흡수하는 능력이 뛰어나 크로마토그래피의 흡착제로 사용된다.

 

사진 1,3: 김여경 기자 kimyk37@snu.kr

사진 2: 장유진 기자 jinyoojang03@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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