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자신을 일치시킨 번역자, 연구자, 교육자
시대와 자신을 일치시킨 번역자, 연구자, 교육자
  • 대학신문
  • 승인 2015.10.03 2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별기고]고 김수행 교수를 기억하며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김공회 연구위원

김수행 선생께서 유명을 달리 한 것도 이제 두 달이 넘었다. 나는 2003년 1월부터 조교로서 그의 연구실에서 2년 반 동안 그와 함께 생활했다. 아직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믿어지지 않지만, 지금이야말로 그의 삶과 사상을 반추해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되새겨볼 시간이기도 하다.

김수행은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그는 마르크스가 생애 대부분을 보내며 그 모순을 고발했던 자본주의 종주국 영국에서 유학했고, 많은 뛰어난 후학들이 같은 곳에서 공부하도록 용기와 자극을 줬다. 그는 또한 여기서 익힌 앞선 연구 성과들을 국내에 소개하고 가르침으로써 우리의 연구수준을 일순간에 크게 끌어올린 동시에 국내에서 ‘자체 재생산’의 토대를 탄탄히 다졌다. 그 자신이 뛰어난 연구자였지만 대중 교육 또한 자신의 중요한 소명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그는 자신의 지식을 가급적 알기 쉽게 풀어내고 대학 바깥에 가능한 멀리까지 퍼뜨리고자 온 힘을 다했다. 요컨대 그는 시대와 자신을 일치시킨 번역자이자 연구자, 교육자였던 것이다.

 

책임을 껴안고 번역으로 보답하다

김수행의 시대의식은 그의 삶의 여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42년에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에 61년에 입학한 김수행은 70년대 초 런던에 가서 82년에 박사학위를 가지고 귀국했다. ‘불온한’ 경제학을 겁 없이 전공했다고는 해도 ‘80년 광주’가 터져 사람들이 말 그대로 ‘죽어 나갈’ 때 그는 해외에 있었고, 바로 그 80년대의 격렬한 투쟁 덕분에 서울대 교수까지 될 수 있었다. 귀국 후 첫 직장이었던 한신대에서 해직당하긴 했으나, 적어도 마르크스를 연구하고 그의 사상을 유포한다는 이유로 구속된 적은 없다. 요컨대 그는 70~80년대의 사회운동에 큰 빚을 진 셈이다. 그는 이 빚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았고, 이런 ‘부채의식’은 그로 하여금 늘 깨어있게 만드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서울대 교수가 됐다는 것이 그에게, 특히 연구자로서 김수행에게 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덕분에 그는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제공받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사회적 책임을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떠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책임은 이후 그의 연구의 성격을 매우 강하게 규정했다고까지 볼 수 있다. 예컨대 서울대 교수로 임용되기 전까지 그는 꽤 전문적이고 당시에는 첨단의 학문적 성과들을 쏟아냈지만(『경제변동론』(1986), 『자본론 연구 1』(1988) 등), 임용된 이후 한동안은 번역에 전념했다. 혈기왕성하고 명민한 젊은 연구자가 번역에 몰두한다는 것은 굳은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이 시기에 그가 내놓은 『자본론』(1989~90)과 『국부론』(1992)은 한 명의 학자가 단 몇 년 사이에 번역해냈다고는 믿기 힘든 대작들이다. 그 외에도 전후 자본주의 성격을 규명한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1993),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 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자본론』에서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금융이론을 전개한 힐퍼딩(R. Hilferding)의 『금융자본』(공역, 1994)을 번역한 것도 이 시기다.

번역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는 것이 연구자로서 김수행에게는 다소 유감스러운 일이었을지 몰라도(‘몇 년 동안 번역에 몰두하다 보니 시력이 근시와 원시의 혼합물로 변해버렸고 새로운 논문을 한 편도 쓰지 못하였다.’ - 『자본론 제3권(상)』의 역자 서문(1990)), 나를 포함한 후학들에게 이 시기 그의 번역작업이 준 혜택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다. 또한 그는 자기 번역의 의의를 ‘학술적’ 측면보다는 대중성에서 찾았다는 것도 재미있는 대목이다(‘나는 이 책이 불후의 명작이므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에 모든 정력을 쏟았다.’ - 『자본론 제1권(상)』의 번역자의 말(1989)). 물론 이러한 대중성 천착은 그의 번역이 삽시간에 널리 퍼지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일정한 한계를 부여하기도 한다.

 

한국 경제를 들여다보다

그의 번역은 1994년 『금융자본』을 기점으로 거의 끊긴다. 물론 이후에도 『자본론』과 『국부론』 번역을 꾸준히 갱신했지만, 새로운 저작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이는 이미 주요 저작들이 그런대로 국내에 소개돼서이기도 했겠지만, 9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인기’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강의실엔 여전히 지식욕과 사회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꽉 찬 학생들이 넘쳐났지만, 예전처럼 1천명 이상이 몰리는 식의 ‘영광’은 더 이상 없었다. 대학원에서 마르크스를 전공하는 학생도 크게 줄어든다.

이것은 분명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였지만 평소 현실 사회주의의 모순에 비판적이었던 김수행에겐 오히려 신념을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일 뿐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인기 감소는 김수행에겐 연구에 몰두할 기회이기도 했다. 때마침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알리는 ‘역사의 종언’이 선언되고, 아시아의 경제 기적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새로운 발전경로임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됐던 바로 그 시기, 급속한 발전과정에서 모순이 누적된 한국경제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간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소개하고 그 나름의 해석을 내놓는 데 주로 힘을 쏟았던 김수행이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경제 연구에 깊이 천착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다. 실제로 1997년 경제공황이 터지고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에 주류 경제학자들조차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게 됐을 때, 김수행은 동료·제자들과 함께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특수성과 자본의 세계적 운동(세계화)을 양자의 상호 관련 속에서 규명하는 연구를 수행해 국내외에서 상당한 관심을 끌 수 있었다.

당시의 경제위기는 주전공 분야가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공황인 김수행에게는 자신의 이론을 현실에서 검증하고 한층 더 발전시킬 기회였다. 나아가 1997년의 동아시아 위기가 2007~08년부터 세계적인 위기로 전화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서울대학교에서 은퇴한 노학자는 『세계 대공황』(2011)을 써내 위기의 양상을 매우 구체적인 수준에서까지 다뤄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2012), 『정치경제학의 대답』(공저, 2012) 등을 통해 위기에 대한 분석을 향후 대안사회에 대한 비전으로까지 확장하고자 했다.

 

더 많은 이에게 기억되다

2008년 초 서울대 은퇴 뒤 김수행은 대중강연자로 변신한다. 당시 한창이었고 아직 세계를 뒤흔드는 경제위기는 그를 ‘스타’로 만들어줬다. 현실 이해와 대안에 목이 마른 대중은 끊임없이 그를 찾았다.

고백건대 나는 그의 이런 행보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의 제자이자 연구 동료로서 나는 언제나 김수행의 연구자로서의 역량에 가장 큰 경외심을 품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점은 누구보다 김수행 자신이 잘 알았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대중을 위한 강연과 저술에 힘을 쏟았던 것은 그가 이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나는 이 사명의 의미를 그가 죽은 뒤에서야 깨달았다. 이름난 과거의 제자들이 김수행과 막걸리 잔 기울이던 추억을 되새길 때, “선생님 덕분에 『자본론』을 알았고 이 사회를 보는 법을 알았다”면서 선생님의 뜻을 잇겠다며 미래를 기약하던 그의 수많은 이름 없는 새 제자들을 SNS 등을 통해 보고서 말이다.

이쯤 되면, 김수행이 자신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 때문에 고통스러웠으리라 여기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을 위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와중에 김수행이 쓴 한 구절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여러 사람이 “어떻게 그 위험한 공부를 시작했는가?”고 물었는데 “내가 좋아서”라고 대답했더니 매우 실망하여 한국사회에 대한 사명감이 없다든가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한다든가 하면서 비판했다. 그러나 한국사회를 위하여 또는 민중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그 일을 싫어하면서도 사명감에 사로잡혀 해서는 더욱 안되며, 학문은 학문적인 기준에 따라 과학적으로 수행해야만 실천에 대한 보다 정확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정치경제학 에세이』(199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