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사학과 권혁은 강사

올해도 한국 근현대사는 도마 위에 있다. 지난 7월, 김무성 여당 대표는 방미 중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 대통령이자 ‘국부’로 재평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바통을 이어 받아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건국 67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정부는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문제를 꺼내놓았다. 마치 잘 짜인 공연을 보는 것처럼 정부와 여당은 일사분란하게 한국 근현대사를 ‘문제’로 만들려고 하는 듯하다. 그 저류에 흐르는 논리는 역사는 국가가 걸어온 길을 긍정하고 국가정체성을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국가정체성이란 개념의 의미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근대 국민국가를 유지하는 데 국가정체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난 6월 미 연방대법원이 미연방헌법의 정신에 비추어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사례에서 봤을 때, 국가정체성은 보통 헌법으로 성문화돼 있다고 여겨지며 종종 한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국가정체성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은 내전을 겪으면서 형성된 국가다. 그것은 국가형성이 엄청난 사회적 갈등과 폭력을 수반했으며, 우리의 국가정체성이 무엇인지 사회가 진지하게 논의할 기회가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한국 근현대사를 도마 위에 올려놓은 ‘국가정체성론’에서는 우리의 국가정체성이 헌법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에 성문화돼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한 사회의 정체성이 헌법에 담겨져 있지 않다는 건 굉장히 이상한 상황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은 수많은 희생과 갈등을 야기한 냉전시대의 유산이다. 한 사회의 국가정체성이 희생과 갈등을 양산한다면 그것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 이 모든 상황을 고려했을 때 기실 우리 사회가 합의했다고 볼 수 있는 국가정체성은 아직 없다. 설령 합의된 형태의 국가정체성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건국’과 동시에 만들어졌는지 의문이며, ‘건국’ 시점부터 고정불변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됐기 때문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인식은 지나치게 목적론적인 사고방식이다. 단군이 있었기 때문에 근대화가 이루어진 게 아닌 것처럼 양자를 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간의 수많은 역사적 요인과 과정을 간과한 것이다. 국가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무턱대고 긍정적 역사관만을 심어줘야 한다는 주장은 ‘헬조선’이라 지칭되는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맹목에 가깝다. 미국 중심적 세계질서의 강력한 자장 속에 있었던 역사를 무조건 긍정하는 것이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질서가 전환기에 놓여있다는 건 중학생도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건국’ 시점의 국가정체성을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고 건국 그 자체를 긍정하기보다, 차라리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를 논의해보는 게 어떨까. 사회가 합의한 가치를 최고 수준에서 성문화한 것이 헌법이라면, 당장 헌법을 꼼꼼히 살펴보고 그 정신을 어떻게 구현할지 혹은 어떻게 진전시킬지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이 역사문제로 갈등을 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사회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국가정체성은 중요하다. 그러니까 한번 논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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