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저/ 김태환 옮김/

문학과 지성사/ 110쪽/ 1만원

선을 보러 간 남자는 묵묵히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쓰였다. ‘이름: 자본남, 연봉: 1억8천, 거주지: 강남 타워팰리스(자택)…’ 최근 인터넷에선 맞선 자리에 나가 바로 자신의 재산 목록을 건넨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말없이 종이만 내민 이 남자를 보며 사람들은 ‘적나라한 현실’이라 말했다. 괴짜 같지만 그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반응이 적잖았다.

『피로사회』『심리정치』로 사회의 ‘우울함’을 들춰온 한병철 교수(독일 베를린예술대 철학과)가 『에로스의 종말』을 냈다. 이 책을 통해 돌아온 그는 ‘에로스’가 사라진 세계의 또 다른 우울함을 전하고 이 배후에 자본주의가 있음을 짚는다. 그가 책에서 논의하는 에로스는 “나 아닌 타자를 향한 열망”으로, 소유욕이나 성욕으로도 정의되지 않는 순수한 열망이다. 이때 에로스는 내게 없는 본질을 가진 이에 닿고자 하는 열망이라 반드시 타자, 즉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이가 필요하다.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하지 못해 퍽 섭섭했던’ 시인 이상은 에로스에 심취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에로스는 이뤄질 수 없는 열망이기에 개인의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사유에 힘을 실어준다. 성과주의적 자본주의 사회가 ‘할 수 있다’며 개인의 의지를 불러오는 것에 반해 저자는 에로스를 더러 ‘할 수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에로스는 마치 병마와 같아 개인이 타자를 자신의 의지로 열망하기 시작하거나 맘대로 그것을 멈출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허나 동시에 저자는 에로스가 나에게 없는 ‘타자’를 떠올리도록 해 사유하는 힘을 키우고 새로운 지평을 바라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전한다. 닿을 수 없는 사랑에 의해 만들어지는 에로스는 자본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신자유주의 속에서 새로운 사유의 원동력으로 자리 잡는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에로스와 공존할 수 없음에도 에로스를 자신의 틀 속에 욱여넣었다고 비판한다. 앞선 ‘자본남’ 사례같이 자본주의 아래서 한 개인은 그가 소유한 것의 집합으로 여겨진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시각이 고유한 개인을 대변할 수 없음에도 자본주의는 고유한 개인을 담지 못한 특성의 조합으로 인간을 전락시킨다. 결국 모든 개인이 자본으로 환산된 세상인 ‘동일성의 지옥’에서 에로스는 ‘특별한’ 대상을 잃고 방황한다.

이처럼 타자를 잃은 에로스는 자본으로 뭉뚱그려진 대상을 쫓으며 왜곡되고, 원하는 대상을 소유하려는 ‘소유욕’으로 변질된다. 결국 신자유주의 아래서 소유욕에 갇힌 에로스는 강력한 개인의 의지에 따라 타자를 쟁취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존재를 열망하던 에로스가 신자유주의 틀에서 눈앞의 것을 소모하는 욕구로 격하된 것이다.

소유욕이 된 에로스는 성과주의의 극치인 ‘성애’(sexual love)로 좁혀지고 에로스 본연의 새로운 사유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손에 의해 에로스는 포르노로 상품화돼 음란한 것으로 전시된다고 비판한다. ‘인생은 짧다. 바람을 피워라’는 표어를 내건 불륜 조장 사이트 ‘애슐리 매디슨’(Ashley Madison)은 이러한 포르노화 된 에로스의 단적인 예다. 특히 저자는 자본주의가 포르노화된 에로스를 전시해 우리 눈앞으로 들이밀며 새로운 사유를 가로막는다고 경고한다. 그에 따르면 우린 이제는 나와 다른 존재를 향해 열망하지 않고, 포르노화 된 에로스에 매몰돼 기존의 사유를 넘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지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한병철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입을 빌려 에로스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앞선 저작에 이어 이번에도 그의 책은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준다. 하지만 이 절망이 마냥 절망적이진 않다. 『에로스의 종말』을 통해 우린 비로소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의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자의 치열한 고찰 속에서 숨 멎은 ‘에로스’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이 책을 두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투쟁 가운데 하나에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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