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은비 사진부장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의 기준에
‘졸업유예’ 선택한 대학생 2만5천
‘모라토리엄’은 질병이 아니라
이 시대 청년에 필요한 ‘뒤늦은 여유’

입학하고 보는 9번째 축제가 열렸다. 신입생 때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오는 축제의 분위기를 느끼면서 잔디를 걷고 있다가 ‘어른 표류기’라는 축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내 얘긴가?’ 싶었다. 애매한 나이, 애매한 위치, 불안한 미래. 성인이지만 어른은 되진 못한 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요즘의 20대에게 너무도 잘 맞는 말이 아닐까.

학교를 5년 동안 다녔지만 나는 아직 졸업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대학생들에겐 너무도 당연해져버린 ‘졸업유예’. 교육부 ‘4년제 대학 졸업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2만5천명이 넘는 대학생이 ‘졸업유예’를 선택했다. 부족한 스펙 보충, 기업의 졸업생 기피 등의 원인이 있겠지만 소속감에 대한 불안이나 치열한 경쟁 사회에 대한 부담 등의 내부적 원인도 크다는 의견이 많다. 졸업과 취업은 미뤄졌지만 봉사, 동아리, 인턴, 여행 등 다양한 활동을 경험하며 사회에 소속되기를 유예하고 ‘탐색’에 열중하는 학생들은 증가했다. 이렇게 예정된 시기에 사회로 진출하지 않고 그 의무와 책임을 지불유예 하고 있는 상태를 ‘모라토리엄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칭하는 비슷한 용어로 ‘피터팬 증후군’ ‘파랑새 증후군’이 있는데 ‘사회에 진출하지 못하는 미숙한 상태’를 뜻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다.

그런데 이 말들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그런 유형의 인간’이라서일까. 이 용어들은 모두 이런 젊은 사람들을 문제가 있는 상태라며 비판조로 정의한 것들이다. 이는 사회가 이들을 문제로 바라보고 질병을 가진 ‘환자’로 인식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는 이런 상태의 사람들을 위한 온갖 개선 방법들을 소위 자기계발서처럼 내놓는다. ‘~해야 한다’ ‘~에 가라’ ‘~를 준비해라’ 등 올바른 삶에 대한 기준을 정해놓고 그에 맞추기를 강요한다. 바람직한 어른의 모습, 사회인의 모습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이 드는 시점이다.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 (좋은)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 어딘가에 소속돼야 하고 그 속에서 인정받고 맞춰 사는 것이 사회가 기대하는 어른일까. 하지만 그 소속과 책임 속에서 오히려 개인은 유리돼 하나의 부속품이 되어가기 일쑤다. ‘기준들’에 맞춰 퀘스트를 깨듯이 매번 허덕이며 무언가가 되어가는 나를 떠올리면,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염증과 휴식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때문에 나는 ‘모라토리엄’은 질병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유예’가 아닌 나를 찾아가는 시간의 ‘여유’. 우리가 어른의 언저리에서 표류하고 있는 까닭은 아직 그 이전의 시간조차도 제대로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준비가 되지 않아서가 아닐까.

요즘 방영하고 있는 ‘두번째 스무살’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여주인공은 한마디로 19살부터 거의 20년을 ‘스킵’ 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 ‘시간을 잃어버린 여자’다. 주인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40이 되어가는 나이에 다시 20대를 살게 된다. 이 드라마는 그녀를 통해 우리가 어른이 되기까지 제때 겪었어야 할 일들, 누렸어야할 즐거움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한다. 유년시절에 겪었어야 할 나를 찾는 시간,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시간들을 학원에 다니기 바빴고, 공부하기 바빴고, 경쟁하기 바빠서 놓쳐버렸기에 지금 우리는 늦은 유예를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예 좀 하면 어떻고 표류 좀 하면 어떤가. 앞으로 남은 긴 삶의 시간동안 ‘나’는 잃어버리고 없는 개개인들이 모인 ‘타인’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러니를 겪지 않기 위해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어른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책임을 ‘질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진 어른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모라토리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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