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이종건 기자 jonggu@snu.kr


이경인(국어국문학과, 15), *창문

감기는 두 눈을 이기지 못하고 잠을 청하게 되는 일은 사실 많지 않다. 그저 밤이 되었고, 지금 자 두지 않으면 언젠가는 피곤이 몰려 올 것을 알기에 억지로라도 휴식을 취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억지 휴식이라는 게 꽤나 달콤한 일이라,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이 잠을 자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잠을 자기 바로 직전까지, 난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연결 짓는 끈질긴 관계의 늪을 헤집고 다녀야 한다.

끈적하고 더러운 이 늪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고단한 일이다. 늪은 넓고 질척대고 복잡하다. 너무 많은 관계들이 얽혀 있어 잠깐 멈춰 서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다. 꽤 친한 동기와 덜 친한 동기와의 관계. 곧 만날 일 없는 선배와 내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르는 선배, 친하게 지내고 싶은 선배와 피하고 싶은 선배와의 관계. 교수님과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친척과의 관계, 촌수로 따지면 남이나 다름없는 친척과, 촌수로는 가까워도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은 친척과, 가까운 친척과의 관계. 동아리 선후배, 동기들과의 관계. 중고교 동창들과의 관계. 애인과의 관계. 가까운 관계. 다소 먼 관계. 이어나가야할 관계. 피해야 할 관계. 관계. 관계. 관계…….

억지로 미소를 짓고, 억지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억지로 칭찬을 주고받는 그 황당한 연극을 하루 종일 하고 난 이후, 나에게 억지로 주어진 시간일지라도 밤이 주는 의미는 매우 클 수밖에 없다. 내게 잠은 소중하다. 난 항상 피로하므로. 잠을 자는 그 잠깐의 시간동안에서야 난 비로소 관계라는 허울에서 벗어나므로.

이런 나에게 너의 존재는 달가울 리가 만무하다. 언제부터인가 내 꿈에 등장해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너라는 존재. 끊임없이 오호, 오호. 호를 외칠 때는 항상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면서. 괴상한 추임새를 넣으면서 그저 내가 잠에 들어 있는 그 시간 전체를 나를 바라보는 데 할애하는 너. 분명한 인간의 상을 지녔음에도 어쩐지 상의 모든 부분이 흐릿하고 유난히 눈만 뚜렷한 인상을 주는 너. 오호, 오호,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는 너를 무시할 자유는 주어지지 않는 그 끔찍한 꿈을 얼마나 오랫동안 꾸고 있는 것인지. 꿈속에서 난 눈을 감을 자유도, 귀를 막을 자유도 갖지 못한 채 그렇게 너의 앞에서 박제된 채 한참을 고문당해야 한다. 내 유일한 휴식을, 넌 그 쉼표마저 더러운 늪에 잠식시키고 만다. 아니, 너와의 밤은 오히려 더 이상하다. 그 수많은 관계들이 전부 사라지고 너와 나라는 단 하나의 관계만이 남아 그저 눈빛만을 주고받는다.

꿈속의 너를 마주한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너도 꿈에 불과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넌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그럼 너의 앞에서까지 내가 연기를 할 필요가 없구나. 너와 나의 관계는 늪 속에 퍼진 그런 진짜 관계가 아니구나. 그때서야 내게는 하나의 자유가 생겼다. 그저 너의 빤한 얼굴을, 나를 응시하는 너의 눈빛을, 간간이 너의 입에서 울려 퍼지는 오호, 오호 그 괴성을 느끼는 것. 내게는 그것 밖에는 허용되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 사람에 치이고, 저 사람에 치이며 피곤에 절은 내게 꿈속에서마저 휴식을 앗아가는 경험, 넌 내게 그런 절망에 불과했는데. 내가 너에게 말을 걸 수 있다니. 이건 꿈일까. 아니지, 이건 원래 꿈이지.

‘꽤 가까운 친척 중에, 그러니까 삼촌뻘 되는 분 중에 내 학비를 대주는 분이 있어.’
“오호.”
‘순전히 노블리스 오블리주, 딱 그거로 말이지. 부모님은 내 학비를 내 줄 여력이 안 돼. 가족관계가 좀 복잡하게 얽히기는 하는데, 어쨌든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 분이 내 학비를 대주게 됐단 말이지. 아버지는 그 사람을 싫어해. 어머니도. 하지만 어쩌겠어, 돈을 그 분이 대주시는데. 오늘 어머니가 그러더라고. 그 분이 돈 부치셨더라. 전화 한 통 해라.’
“오호.”
‘그 분한테 전화를 걸어야 하니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웬걸 번호가 없더군. 생각해보니 전화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인 거지. 지금까지는 그냥 얼굴을 보면서 감사인사를 해 왔으니까. 어머니한테 번호를 여쭤봤어. 어색한 번호. 하기야 내가 외우는 번호는 한 개도 없지만. 어쨌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어. 두 번 걸었는데 안 받더라고. 모르는 번호는 안 받는 모양이지.’
“오호.”
‘아버지가 그 삼촌 분에게 연락을 해 놓은 건지, 아버지한테 다시 연락이 왔어. 이번에는 받으실 테니 연락 한 번 더 하라고. 어쩔 도리가 없으니까. 다시 전화를 걸었어.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제발 이번에도 받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면서. 꽤 오래 이어진 발신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딸깍, 그 소리가 들리더라고. 대화는 짧았어. 난 사실 별로 반갑지가 않은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웃어야 했어. 너무 감사하다고. 삼촌이 있어서 내가 이렇게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고.’
“오호.”
‘대화는 1분도 넘지 못하고, 그래 알았다, 공부 열심히 해라, 그러고 끊겼어.’

지금까지 신경이 거슬리는 잡음에 불과했던 ‘오호’ 소리가 가식이 필요 없는 대화, 그러니까 날것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 주는 너의 응답으로 들렸다.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오호, 유난히 복잡한 관계가 있어.’
“오호.”
‘연인사이라는 것.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오늘 그녀와 싸웠거든.’
“오호.”
‘사실 언제부턴가 우리 사이는 복잡함만이 남았어. 분명히 좋은 관계도 아니고, 이왕이면 끊어버리고 싶은 관계가 된 거지. 싸움의 이유는 항상 단순해. 대화. 우리는 대화를 하기 때문에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어. 싸움에 이유가 있을까 묻는다면, 사실 이유는 없어. 우리는 만났기 때문에 대화를 하지만, 대화를 했기 때문에 싸워야 하는 거지.’
“오호.”
‘비가 내렸고, 난 빗소리가 좋다고 말했고, 넌 애가 항상 우울하게 축 처졌다는 말을 들어야 했고, 빗소리가 좋으면 우울한 게 되는 건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논리냐는 말을 했고, 내가 언제 빗소리 좋다는 걸로 네가 우울한 놈이라는 말을 했냐는 말을 들어야 했고. 그건 결국 싸움으로 번졌고.’
“오호.”
‘헤어져야겠지. 뭐가 무섭다고 아직도 이러고 있지만. 사실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조금 두려운 일이야. 이 관계의 줄기만 끊어낸다고 해서 관계가 완전히 소멸된다, 그게 아니거든. 뿌리가 남으면 그 잔재가 썩어버려. 관계라는 늪이 항상 악취로 진동하는 건 이 썩어버린 관계들 때문인 거지. 그러니까 악취가 더해지지 않으려면 뿌리 채 관계를 뽑아내야 하는데 거의 대부분 관계를 끊을 때 뿌리는 남는단 말이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일거야. 그게 두려워서 헤어지지 못하고 이러는 거지. 어차피 헤어질 걸 알면서도.’
“오호.”

너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 너는 어차피 허상이니까 너한테는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 난 어쨌든 다시 한 번 잠을 휴식으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너와 나 사이는 가식이 없었다. 오호, 오호, 너는 나의 말을 억지로 포장하려 들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넌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누군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렇게 나는 내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 너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이제 더 이야기할 관계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부모님 이야기? 그리고 나 자신. 이제 할 이야기는 그것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넌 오호, 감탄사를 외친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 시선도 변하지 않는다. 너의 그 눈이 도드라지고, 오호를 외칠 땐 동그랗게 말리는 그 입술도 도드라진다.

‘오호, 난 내 부모님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많아.’
“오호.”
‘어릴 적엔 유복했는데 중간에 아버지 일이 크게 망해서, 이런 변명조차도 없는 그저 가난하고 무능력한 아버지. 화 한 번 제대로 낼 줄 모르고 그저 참기만 하는 어머니. 결국엔 자기 삶을 포기하고 마는 그 모양새가 난 너무 부끄러워.’
“오호.”
‘오호, 이런 난 어쩌면 처음부터 이상한 녀석일지도 몰라.’
“오호.”
‘내 이 풀리지 않는 피로감이 다 첫 관계부터가 곪았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오호.”
‘넌 그 곪아터진 내 관계의 늪에서 피어오른 환상에 불과하겠지.’
“오호.”
‘근데 넌 오늘 나를 닮았네.’
“오호.”
‘항상 넌 흐릿했는데, 오늘 넌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나를 똑 닮았어.’
“오호.”

나는 너의 목을 조른다. 어쩌면 나의 목을 조르는 것일까. 너는 결국 나였구나, 결국 너와의 대화마저도 대화는 아니었구나. 꿈에서 너의 목을 졸라봤자 사실 넌 어떻게 될 리 없는데. 네가 숨을 쉬는 존재인지도 난 모르니까. 넌 살아있는 존재일까? 대체 넌 뭐지? 넌 왜 내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머리가 어지럽다. 지금까지 너의 인상이 흐릿했던 것, 넌 그저 눈과 입으로만 존재했던 것, 그게 어쩌면 내가 널 애써 무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너의 목을 다시 조른다. 숨이 막히는 것만 같은 기분. 널 죽여야만 할 것 같아. 아니, 내가 너의 목을 조르는 게 맞나? 네가 나의 목을 조르는 건가?
머리가 어지럽다.

“오호.”

 

*창문: 국어국문학과 학부생들로 구성된 창작 소모임이다. 2013년 과내에서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시와 소설 부문에서 많은 창작이 이뤄지고 있다. 그밖에 발제, 토론, 예술작품 연계 감상 등 다양한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