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가판대에 있는 『대학신문』을 한 부 집어 드는 것이 일주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같이 느껴진다. 신문의 표지에는 학교의 큰 소식과 작은 소식들을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해 자잘한 학교 이야기와 다양한 기사들이 어우러져있다. 여러 사람의 시간과 노력이 깃들여져 그 정수가 담긴 하나의 작품으로 보인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고통을 종종 산고에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산고 끝에 탄생한 신문에 담긴 애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텐데 사람들은 이렇게 탄생한 신문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가판대를 지나갈 뿐이다. ‘종이신문이라서 그런가?’ 하는 의문도 종종 들기도 한다. 과거에 종이신문이 갖고 있던 보편성은 점차 기술 발달로 인해 희소성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침 지하철에서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반면에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는 사람들이 증가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기술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 88만원 세대, 이태백 등등 다양한 명칭들로 불리며 최근 불거진 수저논란을 비롯해 다양한 수식어들이 따라다니는 20대 청춘들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볼 수 있는 것은 그 무관심이다. 인생이라는 험난하고도 긴 여정으로 인해 힘든 삶들을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이 없는 것은 맞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내게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지 않으면 관심을 쏟지 않는 것이 지금의 우리세대이다. 기획 기사에서도 언급했듯이 과거 「연세춘추」에서 다루었던 인혁당 사건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처럼 학보는 학생들이 정부의 간섭 없이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기구였다. 어떻게 보면 그 어떤 간섭 없이도 학생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하나의 성지였다. 하지만 지금 그 성지가 침범당하고 있다. 「상지대신문」과 「서울여대학보 찐언」의 1면 사건처럼 우리의 목소리가 줄어들고 있는데, 정작 그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오직 최소한의 목소리를 지키려는 사람들만 아등바등할 뿐이다.

부모님 세대의 학보를 악기 연주에 비유하자면 오케스트라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학 신문을 두고 자신의 의견을 서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다양한 시각에서의 접근들이 있었을 것이다. 자유를 억압받던 그 시절에는 획일화된 시각들이 강요됐다면, 지금은 다양성이 보장되는 시대이다. 그러나 다양성이 보장됐음에도 우리는 다양한 소리를 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무관심이라는 트렌드를 받아들이고 시대를 역행하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지금 시대의 학보를 악기 연주에 비유하자면 콰르텟, 트리오, 듀엣 그리고 결국엔 솔로로 점차 그 소리가 작아지고 있다. 결국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우리의 목소리는 점차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장원
재료공학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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