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훈 부편집장

교육의 영역에 경제논리 적용시켜
사회를 퇴보시키는 학제 개편안
공교육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충분한 내적 성숙의 기회를 제공해야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릴 적에는 빨리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떡국을 두 그릇 먹는다고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나 어른한테는 방학이 없다는 것 역시 곧 깨달았지만 말이다. 아마도 어린이이자 청소년이었던 모든 사람들은 어서 자신을 구속하는 학교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이러한 바람을 높으신 분들이 어떻게 들으셨는지 2주 전 당정협의회에서 초등교육 과정과 중등교육 과정을 각각 1년 줄이는 학제 개편안을 검토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당정은 늦은 사회 진출로 인한 늦은 결혼이 저출산과 사회 고령화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면서 기존의 ‘재정을 투입하는 대책’이 아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룩하신 높으신 분들께 축하 말씀을 드린다. 늦은 결혼과 낮은 출산율의 문제를, 빨리 학교에서 내보내줄테니 취직하려는 ‘노-력’을 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고견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비록 그 전환의 결실이 될 사회는 지금까지 온 길을 거꾸로 갈 것이지만 말이다. 아마 높으신 분들은 19세기 중엽 산업 혁명기에 청소년들이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채 작업장으로 끌려가던 모습을 우리 사회가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해왔던 ‘창조’라는 개념의 정의가 위정자들의 ‘창조’적 해석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 이 와중에 나온 학제 개편안은 경제와 정치의 영역에 밀려들어온 창조의 물결이 이제는 교육의 영역을 넘보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로 남을 것이다. 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역사의 치부를 긍정하려 ‘노-력’하면 우리 역사의 치부가 자랑스러운 역사로 변신할 수 있다는 역사관의 고백이었다. 그리고 이번 학제 개편안은 교육권 보장이라는 국가의 의무를 경제논리에 따라 자랑스럽게 내팽개칠 수 있다는 정부의 신념을 선포하는 기념비적 사건일 것이다.

이번 개편안은 교육이 경제논리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천박한 물질주의적 관점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교육이 담당해야 할 학습자의 내적 성숙의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더 나은 개인이 모여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보다 나은 사회에서 보다 나은 개인이 형성된다는 것을 정부와 여당은 모르는 듯하다. 학교에서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탐색해가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교육의 중요한 역할이다. 교육을 통해 개인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가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사회 구성원의 사회에 대한 기여에 상응하는 국가의 의무다. 그리고 국민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 스스로의 지속과 발전을 담보하는 방법이다.

이에 꼭 학교에서만 개인의 가치관과 꿈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다. 물론 학교 밖에서도 개인의 내적 성숙을 이룰 수 있다. 한 번의 실패만으로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우리 사회의 비정함을 ‘쿨’하게 넘기며 배움의 대가를 치렀다고 넘겨버릴 수 있는 패기가 있다면 말이다. 학창 시절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생계의 문제에서 해방돼 스스로를 형성해나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이 시간의 일부를 빼앗긴 채 사회에 나가 사회의 부속품이 된 개인들의 집합이 과연 미래를 가진 사회가 될 수 있을까?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 역시 언제나 같은 양상으로 이뤄질 수는 없다. 그러나 교육이 변화해야 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결혼을 늦게 한다는 것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 실현되는 사회가 된다면, 아직 어른이 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모여 이뤄진 사회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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