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점차 심화되는 불평등에 대한 고찰

지난달 31일 문화관에서 열린 ‘제58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 한국사회 부의 불평등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김낙년 교수(동국대 경제학과)는 2000년부터 2013년까지 국세청의 상속세 자료를 토대로 한국사회 부의 분포도를 분석한 결과 20세 이상 성인 기준으로 자산 상위 10%가 전체 부의 66%를 보유하고 하위 50%의 자산은 2%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세상은 본래 불공평하다. 당신이 가난한 것은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산에 많은 기여를 한 만큼 분배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 교수의 연구는 이러한 믿음 아래 열심히 생업에 종사해온 시민들을 좌절시키는 결과였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부자가 될 수 없는 현실은 더더욱 노동자의 근로의욕을 꺾었다.

최근 경제학의 관심은 불평등을 향하고 있다.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지난해 단 한 권의 책으로 경제학계 스타가 된 토마 피케티, 그리고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까지, 이들은 ‘왜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는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불평등의 문제가 사회정의 문제를 넘어서 또 다른 성장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경제 문제로 대두한 것이다.

앵거스 디턴과 불평등의 기원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교수(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과)는 저서 『The Great Escape: Health, Wealth and the Origins of Inequality』에서 부제 그대로 역사 속 인간의 건강 수준 및 부의 성장 과정에서 탄생한 불평등의 기원에 대해 밝혔다. 건강과 보건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기존 경제학 흐름과 달리 평균기대수명의 변화를 따라 보건 수준의 성장과 불평등을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이는 그가 책의 제목처럼 ‘웰빙’(well-being), 즉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은 건강(health)과 부(wealth)의 성장에 달려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건강의 증진은 삶을 더 만족스럽게 하고, 더 효율적으로 일하도록 하며, 더 많은 돈을 쓰면서 가족 및 친구와 즐겁게 보낼 수 있게 한다”고 짚었다.

디턴에 따르면 문명화는 인간을 빈곤에서 탈출하게 해준 성장의 과정이었다. 초기 인류는 매머드 같은 커다란 동물을 사냥하고 남은 음식을 모든 구성원이 균등하게 나눠 가졌다. 이는 당시에 음식의 보관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등한 분배는 수렵 집단에 권력과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는 평등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디턴은 수천 년간의 평등한 분배로 인해 인간은 평등에 대한 무의식적 갈망을 가지게 됐다고 분석했다.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접어들며 인류는 정체된 평등 대신 성장을 선택했고 높은 유아사망률과 빈곤으로부터 탈출했다. 18세기 전까지 전쟁과 기근에 따라 매해 요동치며 평균 40세 수준에 머물렀던 인간의 기대수명은 유럽의 계몽주의와 과학기술 발전으로 20년 가까이 증가했다. 질병에 대한 연구와 미생물학의 발전, 하수도 시스템과 정수 기술의 도입은 사회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위대한 탈출’은 여러 불평등을 동반했다. 농업사회는 부를 축적할 수 있게 했고 이를 둘러싼 갈등과 전쟁, 지배와 피지배 집단 간 소득 불평등을 초래했다. 또 디턴에 의하면 18세기 유럽의 귀족과 평민의 기대수명은 서로 차이가 없었으나 19세기 들어 그 차이는 20년으로 증가했다. 1721년 당시 높은 비용으로 인해 영국 귀족사회에만 제한적으로 도입됐던 종두법*은 1799년이 돼서야 일반 시민들에게도 보급되는데, 이는 디턴이 말하는 성장과 불평등의 관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디턴은 새로운 기술 혁신이 상류층에 먼저 보급돼 불평등이 생기고 혁신이 점차 사회 전반에 보급되면서 불평등을 다시 감소시키며 사회가 발전한다고 봤다. 그는 불평등이 성장의 부산물일 수도, 성장을 위한 전조일 수도 있다고 봤으며, 성장과 불평등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며 사회는 그 격차의 균형을 맞춰가야 한다고 말한다.

불평등은 불평등을 낳는다

『21세기 자본』에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분석한 토마 피케티 교수(프랑스 파리경제대학 경제학과)가 말하는 불평등의 양상은 디턴과 달리 더욱 비관적이다. 피케티 논지의 핵심은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을 때 불평등이 심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을 많이 소유한 상위 계층이 자본 수익을 통해 빠른 속도로 부를 획득할 수 있는 데 반해 자본을 거의 갖지 못한 하위 계층은 경제 성장에만 의존해 느린 속도로 노동 소득의 부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뒤처진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면 성장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디턴과 달리 피케티는 부의 불평등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노동 소득의 증가가 자본의 성장을 따라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미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선진국들과 폭발적이던 경제 성장이 둔화하고 있는 중국에서 볼 수 있듯, 세계적으로 경제 성장은 그 한계를 보인다. 성장률이 정체되면 자연스레 자본수익률은 경제성장률보다 높아진다. 이에 처음부터 커다란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 소위 ‘금수저’들이 노동과 관계없이 더 많은 돈을 벌게 되고 계층 간 소득 격차가 증가한다. 피케티에 따르면 1990년에서 2010년 사이 40억 달러였던 빌 게이츠의 재산은 500억 달러로 증가했고 이는 연 13%대의 성장률을 보였는데, 이는 같은 시기 미국의 경제성장률보다 3배 이상 높다. (『대학신문』 2014년 9월 21일 자)

여기서 나아가 부의 불평등이 정치 체계까지 잠식해 경제적 범위를 넘어서 민주적 정치 과정까지 조작한다는 정치사회학적 주장도 있다.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미국의 대표적 진보 경제학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미국 컬럼비아대 경제학과)는 자본을 가진 상위 1%가 정치가들과 영합해 사회 구조를 자신들의 재산 축적에 이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2013년에 출판된 『불평등의 대가』에서 1%의 부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자신들의 부와 지위를 공고히 하는지 고발한다.

‘지대 추구’는 스티글리츠가 제시하는 불평등의 주요 원인이다. 지대란 본래 토지 소유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뜻한다. 이는 토지를 소유하고만 있으면 얻을 수 있는 임대 수익으로, 저자는 이 지대의 정의를 토지를 비롯한 자본, 천연자원 등 어떤 권리를 독점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얻는 소득으로 확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스티글리츠는 자본과 정치까지 독점한 상위 1%에 의해 지대 추구가 무분별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라크 전쟁 초기 당시 딕 체니 부통령이 CEO를 역임하던 미국의 자원개발 지원업체 핼리버턴이 70억 달러 규모의 정부계약을 무입찰로 따낸 것은 지대 추구의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스티글리츠는 경제가 정치를 장악하면 디턴 교수가 주장하는 성장과 불평등의 균형은 유지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지난 대선에 투입된 20억 달러 넘는 기부금 대부분은 상위 1%의 부자들의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견해를 대변할 수 있는 후보를 지원하고, 대중의 정치혐오를 부추기면서 하위 계층의 정치에 대한 관심도를 저하시킨다. 그러는 사이 지속적인 감세정책에 따라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세율이 더 높아졌다는 게 스티글리츠의 주장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 또한 소득 상위계층을 위한 정치가 만연하다. 이명박 정부 이후 법인세 최고세율은 2000년 28%에서 2014년 22%로 대폭 감소했지만, 소득세 최고세율은 40%에서 38%로 소폭 감소하여 여전히 기업에 비해 가계가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다. 현 정부 또한 복지재원 확충을 위해 법인세 인상 대신 담뱃값 인상을 시행하고 지방세 인상 등을 추진하며 오히려 서민 부담을 가중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인 1표의 원리가 사라지고 300년 전의 1원 1표의 원리가 다시 도래하고 있다는 말까지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새로운 성장을 위한 시도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세 경제학자의 공통적인 주장은 ‘지나친 불평등은 성장을 방해하므로 이를 완화할 구체적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디턴 교수는 『The Great Escape』에서 “불평등은 뒤처진 이들을 북돋워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주 사악해져 이익을 소수에 너무 집중시키기도 하며, 이로 인해 경제 성장을 질식시키고 경제의 작동에 차질을 빚게 하기도 한다”고 말하며 지나친 불평등을 경계한다.

스티글리츠 또한 불평등을 통해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부자들은 이 불평등 때문에 오히려 경제 성장이 저해되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불평등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감세와 규제 완화로 인해 정부의 공공투자가 줄어 기초 연구와 교육 같은 공공재가 감소했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혁신의 우물은 점점 말라붙게 되고, 사회보장제도의 축소로 노동자는 일할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불평등은 국가경제 차원에서는 총생산성을 감소시켜 장기적으로는 상류층의 부까지 감소시키는 결과를 유발하게 된다.

과도한 불평등을 막고 꺼져버린 경제 성장의 엔진에 다시 기름을 붓기 위해 세 명의 경제학자가 공통적으로 내놓은 해답은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다. 70년대 이후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주류 경제학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재등장한 자유방임적 시장체제는 불평등의 확산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의 구체적인 역할에 대한 방향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디턴 교수는 정부가 시민들을 질병과 사망으로부터 보호하는 방패가 돼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과한 불평등으로 인해 성장으로의 유인이 감소하는 것을 정부가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디턴의 주장 중 흥미로운 부분은 일반적으로 효과적인 경제 성장 방법이라고 생각되는 선진국의 빈곤국가에 대한 경제 원조 프로그램을 비판했다는 점이다. 그는 외부 원조는 정부가 세금납부자의 필요성을 잊게 한다고 봤다. 이에 따라 정부는 더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해 국민의 소득과 건강 수준을 성장시킬 필요가 없어지게 되며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디턴 교수가 특히 개발도상국의 성장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면 피케티와 스티글리츠는 선진국 경제를 중심으로 국가 내 계층 간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역설한다. 스티글리츠는 상류층의 지대 수익에 세금을 부과해 공공재 생산을 위한 재원을 확충하자고 주장한다. 그는 투자를 활성화한다는 명목으로 법인세를 인하해주는 방법보다 실제로 투자를 하는 기업에 세율을 인하해주는 정책에 높은 평가를 내린다.

지대에 세금을 물리자는 스티글리츠와 마찬가지로 피케티는 자본에 세금을 물리는 자본세 도입과 누진세 강화를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상위계층에 가중된 자본을 하위계층에 재분배하고 소비 증가를 겨냥하는 것이 불평등 극복을 통한 성장을 꾀하는 효과적인 정책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 불거진 한경BP의 『The Great Escape』 왜곡 번역 논란은 여전히 성장과 평등을 대척점에 놓는 한국사회 주류의 잘못된 시각을 대변해주는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출판사는 책의 제목을 『위대한 탈출: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로 변경한 것을 시작으로 해 각 부와 장의 제목, 내용의 편성도 임의로 편집했다. 디턴을 ‘좋은 불평등’을 주장하는 성장론자로 둔갑시켜 피케티와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한국의 기득권층이 성장우선주의에 빠져 불평등 문제를 외면하려 하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불평등에 대한 담론은 1755년 장 자크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사유제도의 등장과 함께 인간 사이의 평등은 사라지고 부자가 불평등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의 상태를 제도화한다고 비판한 때와 유사하다. 루소의 논문이 발표된 1755년부터 2015년까지 인간 사회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더 복잡한 양상으로 변모했다.

과연 21세기에는 이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2014년 기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노인 빈곤율과 성별 임금격차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한국사회도 그 뿌리 깊은 경제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경제학 석학들이 제시한 불평등 해소 방안들을 구체적이고 진지하게 검토할 때다.

*종두법: 천연두의 예방접종 방법

**자본수익률: 자본의 총액과 이로부터 얻는 이윤, 배당금, 임대료 등의 비율

삽화: 이철행 기자 will502@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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