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과 한성일 교수

11월 3일 정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확정 고시했다. 교육부 장관은 “사회적 혼란을 막고 국민 통합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역사 정체성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기술을 통해 학생들에게 긍지와 패기를 심어주는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전개된 많은 반대를 의식해서였는지, 국무총리는 “편향된 역사교과서를 바로잡아야 학생들이 우리나라와 우리 역사에 대한 확실한 정체성과 올바른 역사관을 가질 수 있다”며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한 정부의 진정성을 믿어 달라”고 호소했다.

정부 정책처럼 공적 사안과 관련해 진정성에 호소하거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별반 생산성이 없다. 의심하는 자는 호소자의 진정성을 문제 삼고 있으니 진정성에 호소하는 것이 의심하는 자에게 아무런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호소하는 자는 공공의 이름으로 진정성을 호소하고 있으니 호소자 개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표적을 빗나가기 십상이다. 공공정책에 대한 판단은 그것의 타당성 여부로 결정돼야 한다. 다른 의도를 숨기고 제안된 정책이라도 공적 관점에서 타당하다면 수용돼야 하고 훌륭한 의도에 기초한 것이라도 공적 관점에서 타당하지 않으면 포기돼야 한다. 이 글에서 나는 정부의 진정성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이 사안에 대한 정부의 태도에 관해 심각하게 우려하는 바를 표명하려 한다.

정부가 국정화의 필요성에 대해 호소하는 과정에서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정부가 역사적 참(truth), 역사적 참에 대한 학적 평가의 타당성 여부를 논의의 중심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는 현행 교과서들이 역사의 특정 부분을 “편향적으로” 다룬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만약 다루고 있는 내용이 거짓을 담고 있거나 학문적 관점에서 강조될 가치가 없는 것이 사적 의도로 과장된 것이라면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선 말한 바가 아무것도 없거나 말했던 것은 잘못된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 정부는 현행 체제의 문제를 바탕으로 국정화를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 문제가 무엇인지 말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정부의 목적이 사실은 현행 교과서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와 별개로 현행 교과서에서 강조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다른 부분을 강조하여 미래 세대에게 자긍심을 고취하려는 것일지 모르겠다. 만약 정부의 목적이 정말로 그러한 것이라면 (나는 그것이 아니길 간절히 희망하지만), 나는 지성과 문명의 이름으로 그에 강력히 반대한다. 환호를 보냈던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 거짓된 데이터에 기초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우리가 가졌던 자부심은 순식간에 수치로 변모해버린다. 5월 햇빛 쏟아지던 어느 오후 떨리게 손 잡았던 당신의 연인이 그 순간 당신 모르게 다른 연인과 만나고 있던 것이면 당신의 행복의 시간은 의미를 상실하고 흩어져버린다. 우리 역사에 과오가 있다면 과오가 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부분이 있으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역사적 참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자긍심이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안착할 수 있다.

정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국민통합을 위한 일이라 말한다. 이러한 주장에서 필자가 발견하는 것은 여전히 참의 가치를 경시하는 정부의 태도다. 국민통합이 무엇인지,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역사교과서는 국민통합을 위한 도구일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역사교과서는 역사적 참과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장이다. 그러한 것이 이뤄져야 할 곳은 타당성과 근거를 요구하는 힘이 그리고 그 힘만이 논의를 규제하는 학문영역이다. 반면 국민통합은 (만약 필요한 것이라면) 정치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역사교과서를 통해 이룰 일은 아니다. 현행 검정체제가 유지될 근거도, 마치 여러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고르듯이, 관점의 다양성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한 관점이 지니는 한계와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여 참에 이르는 데 필요한 까닭이다.

정부의 진정성을 믿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정부가 주장하는 바에서 국정화를 지지할 어떠한 근거도 찾지 못하겠다. 역사적 참에 대한 존중의 태도 없이 우리가 자긍심을 가지고 행복한 미래를 살기 위한 일이라 주장한다면, 볼테르의 우화에서 설사 괴롭고 고달프더라도 참을 향한 지성을 선택한 브라만처럼, 나는 역사적 참에 대한 존중을 위해 기꺼이 불행한 미래를 택하겠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겠다. 그건 각자가 결정할 몫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참의 가치를 존중하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하는 나의 바람이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를 희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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