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학술행사가 끝난 뒤 열린 리셉션에 참여했다. 그는 "역사를 직시하고 사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현재 일본의 풍조에 우려하고 있다"며 "한일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전했다.

광복 70주년,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아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방한했다. 그는 지난 8월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 순국선열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해 역사수정주의 행보를 밟는 아베 총리와 대비되는 정치인으로 여겨진다. 지난 5일 문화관 중강당에서 열린 특별강연에서는 한일관계를 넘어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향한 여러 논의가 이뤄졌다.

 

일본의 경제위기가 키운 우익집단의 혐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일본이 한국·중국과 소원해진 원인 중 하나로 일본의 우경화를 꼽았다. 일본 우경화의 발단을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불리는 경제 위기에서 찾은 그는 “주변국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시기에 불황을 맞은 일본이 자신감을 상실해 한국과 중국에 관대함을 잃었다”고 전했다. 그는 일본의 경제 불황에서 야기된 혐오감이 아베의 자민당 정권과 만나 일본 우경화를 심화시키는 원동력이 된 점에 우려를 표했다.

독도분쟁을 기점으로 한일갈등이 심화되고, 최근 뚜렷한 성장세를 보인 중국을 견제하는 중국위험론이 대두하자 일본의 우익집단은 양국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언설을 쏟아냈다. 이에 대해 이종원 교수(일본 와세다대 아시아태평양연구과)는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시민사회가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도”의 필요성을 전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 교수의 발언에 공감하며 “일본 내 혐오언설을 법률을 통해 규제해야 한다”고 표명했다. 실제로 작년 9월 UN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일본을 대상으로 혐오언설 규제법을 만들기를 권고했지만 이를 규제하는 법률은 아직 제정된 바 없다.

그러나 중국위험론 자체에 대해선 하토야마 전 총리는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그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전승절 70주년 기념식에서 30만의 병력 감축을 약속한 것을 높게 평가하며, 중국위험론에서 오는 위험의식 해소를 위해선 중국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물론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일본 내에 퍼져있는 중국위험론은 그 실체보다 더 주목받고 있다”고 첨언했다. 현 아베 정권이 중국의 국방이 강화되는 현상을 일본 우경화를 위한 전략의 하나로 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의 국방비가 큰 증가율을 보이는 것은 GDP 증가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동아시아 외교에서 현 일본의 정치 세력이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긴 어렵다고 내다봤다. 이원덕 교수(국민대 국제학부)가 현재 한일관계의 심각성을 해결할 방도를 묻자 그는 “경제가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며 “일본이 국제적인 흐름 속에서 경제적으로 회복해 자신감을 얻으면 한일관계가 급속도로 좋은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낙관으로 답했다. 그는 일본 우익세력을 강력히 견제하면서도 기성 정치세력의 변화를 통해 이들을 견제하는 방안에는 회의적이었다. 비 자민당 표를 모을 야권의 통합이 자연스레 이루어지지 않느냐는 이 교수의 물음에 그는 “기존의 정당이 결합하고 분리되는 식의 움직임은 국민이 외면한다”고 답했다. 대신 그는 정계 밖에서 움직이고 있는 일본 청년층을 지목하며 “자민당과 민주당의 대립구도가 아닌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럽연합에 견줄만한 동아시아공동체를 향해

하토야마 전 총리는 ‘우애’를 기반으로 혐오감정을 넘어 동아시아 국가들이 연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모여 EU(유럽연합)와 같은 경제·안보·통화 협력을 이루는 국제기구를 설립해야 함을 표명하며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국과 한·중·일 3개국이 그 중심이 돼야 한다고 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중국은 이미 동아시아공동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며 한국과 일본의 참여를 독려했다. 특히 그는 일본에 대해서는 “선두에 서서 선도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그 이면에는 전쟁 패전국에 주어진 책임의 연장으로 동아시아연합 형성을 도울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하토야마 전 총리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은 아직 흐릿한 밑그림 단계에 가깝다. 국제전략연구소 김인식 이사장이 기존에 존재하는 많은 연합체가 있음에도 새로운 공동체 설립을 주장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조직을 제시하고 함께 모여 논의할 장을 연다는 것은 나중에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정도의 답을 전했다. 임현진 명예교수(사회학과)는 “유럽연합은 경제통합, 정치통합, 사회통합으로 흘러갔으나 유로존의 위기와 함께 경제통합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섣불리 통화협력을 이루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럼에도 하토야마 전 총리는 교육·문화·경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동아시아공동체가 할 수 있는 교류에 대해 소신 있는 의견을 내비쳤다. 그중 경제의 측면에서 그는 동아시아 경제협력은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가 아닌 FTA(자유무역협정) 형태로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 TPP는 확장된 FTA의 개념으로, 미국은 협의국 간에 공동시장을 만들어 세계시장에서 중국을 견제하고자 이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아베 정권은 2013년도에 TPP 협의국이 됐고, 일각에선 일본의 자동차 분야 수출량이 증가하는 효과를 예상하고 있다. 지난 6월에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서 발표된 「TPP 이후 한·일 대미(對美) 수출 전망」에선 우리나라가 중국의 참가 여부와 체결국 간 협상 내용에 따라 참가 시기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하토야마 전 총리는 예외 없는 관세 철폐와 함께 ISDS(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도)가 포함된 점을 들어 TPP가 양국 농민을 위기에 처하게 할 것이라 역설했다. 특히 ISDS는 거대 다국적기업이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걸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를 “미국이 신흥국가를 대상으로 압박을 주고자 할 때 필요한 조항”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반해 그는 한·중·일 3개 국이 FTA를 체결한다면 상호보완적으로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 전했다. 김병연 교수(경제학과)는 이러한 의견에 대해 한·중·일 FTA와 TPP를 동시에 체결하는 방안과 한국의 TPP 가입 가능성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밝혔다. 이에 하토야마 전 총리는 “TPP를 한·중·일 FTA보다 먼저 시행한다면 문제가 있지만 동시에 진행한다면 한·중·일 FTA가 더 중시될 것”이라 답하며 한·중·일 FTA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국가 간 ‘우애’를 강조하는 하토야마 전 총리의 외교관은 다소 이상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토야마 전 총리 역시 자신의 제안들이 현 아베 정권이 지향하는 바와 상당히 다르므로 멀게 느껴질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광복 70주년,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아 방한한 그가 “전쟁의 피해에 대해 패전국이 짊어져야 하는 무한책임”을 안고 제안한 방향들은 그가 인용한 쿠덴호프 칼레르기의 다음과 같은 격언에 미뤄 보아 분명 의미 있는 고민이 될 것이다. “대단한 역사적 사건들은 유토피아로 시작해 현실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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