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서영 문화부장

문학에 가해지는 ‘올바름’의 잣대와
‘건전함’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힌 사회
건전성의 반대편에 놓인 ‘불온함’
문학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나

 

지난달 28일 열린 여당 주최 포럼에서 정부가 역사 교과서에 이어 다른 과목까지 국가의 기준대로 ‘올바르게’ 정하겠다는 뜻을 발표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경쟁주의를 부정하는 불건전한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자유경제원 사무총장님께선 현행 문학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에 대해 할 말이 많으신 듯 보였다. 그의 발언에 따르면 최인훈의 『광장』에는 남한이 ‘북한처럼 게으름과 방탕한 자유가 있는 곳’으로 묘사됐으며, 신경림의 『농무』는 ‘유신 시대의 산업화 과정을 비판 및 왜곡해’ 심히 우려가 된다. 이런 패배주의적이고 선동적인 작품이 교과서에서 읽히다니! 이 어디 ‘노오력’이 최고의 가치인 ‘헬조선’에서 내버려둘쏘냐.

그럼 대체 윗분들이 말하는 올바른 문학 작품이란 뭘까 생각하다보니, 문득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붙어 있던 시가 떠올랐다. 놀랍게도 살면서 스친 몇 백편의 이른바 ‘지하철 시’들은 관찰 결과 대부분 다음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첫째, 내가 초등학교 문예 시절에나 쓰던 ‘별빛’ ‘햇빛’ 같은 어휘를 유미주의적이랍시고 늘어놓는다. 둘째, ‘꽃’ ‘구름’ ‘하늘’ 같은 자연물에 지나친 찬사를 보낸다. 셋째, ‘가족’ ‘사회’에 대해 긍정한다(그것이 설령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넷째, ‘용기’ ‘희망’ ‘위로’를 독자에게 불어넣기 위해 애쓴다.

이 중 많은 수가 프로 시인들이 작성했으며, 11명의 전문 심사위원들이 시민들을 위해 가려 뽑은 시라는 사실을 듣고 좀 놀랐다. 시민의 ‘정서적 여유’와 ‘문학적 소양’을 키우겠다는 선발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는 작품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렇게 되고 보니 윗분들이 그렇게 지키고자 하는 ‘올바르다’ ‘건전하다’ 같은 가치가 사실은 ‘고루한 가치로 획일화되다’의 동의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 모두가 학창시절 때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건전한 삶을 살도록 교육받았으나 건전한 이성교제, 건전한 성교육, 건전한 여가생활이 우리의 실생활에 막상 와 닿은 바는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건전한 ‘문학’이라고 해서 무언가 더 특별할 거라 기대하는 것도 이상하다.

특히 문학의 가치를 판단할 때 ‘건전성’은 전혀 유효한 기준이 아니다. 오히려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 중 하나는 인간과 이 사회의 심연을 얼마나 깊숙이 들여다봤는가며, 그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언어’라는 신비로운 재료로 한발 더 새로운 세계에 뻗기 위해 노력했는가다. 어쩌면 그것은 건전성과 반대 지점에 놓여 있는 ‘나쁜 것’ ‘비정상적인 것’ ‘퇴폐적인 것’과 더 일맥상통하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 나쁜 것들의 총체를 ‘불온함’이라 한다면, 이 불온함은 이미 우리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건전한 문학에 대한 강박은 시대가 불온의 힘을 두려워할 때 생겨난다. 1970년대 북한은 김일성 일가를 우상화하며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주체문예이론’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주체문예이론이란 북한의 기형적인 정권 구조를 혁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도입된 발상이다. 하나의 이념만이 인정되는 숨 막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톱니와 나사’로 전락해버린 문학은 다양한 기준과 가치를 품는 법을 잊었다. 그 와중에 인간과 사회가 갖고 있던 이채로운 모습이 가려졌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와 동일한 일들이 2015년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문학의 본질은 ‘불온함’에 맞닿아있다. 김수영 시인이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한 것이다”고 선언했듯이 말이다. 그는 모든 살아있는 문화가 꿈과 불가능을 추구하기 때문에 불온하다고 봤다. 인간의 수많은 가능성과 불가능을 언어라는 재료로 포착하는 일. 국가의 엄정한 기준에 따르다가 오히려 문학의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건전한’ 문학은 과연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길일까 의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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