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의 삶이란 글읽기와 글쓰기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이 두 가지를 위해서 부수적으로만 존재할 따름이다.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고 굳이 묻는다면, 글쓰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읽기란 아무나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쓰기란 아무나 아무렇게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태산처럼 쌓여져 올라가는 인쇄물의 더미 속에, 파도처럼 덮쳐오는 텍스트의 홍수 속에 아무렇게나 씌여진 종이 뭉치를, 문자 꾸러미를 더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낭비가 아니다. 그러나 대학원에서의 글쓰기란 언제나 글읽기와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져 있어야만 한다. 대학원에서의 글쓰기는 글을 읽은 결과를 세상을 향해 보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글쓰기란 자신만의 읽기법을 터득한 사람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자신만의 독법을 찾는 길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우선 첫 번째 경우.

 

 

“남들이 못 알아먹게 쓰는 것은 죄악이며, 이는 이 수용미학의 시대에, 소통 이론의 시대에는 반역 행위이다. 쉬운 내용을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써내는 짓은 쉬운 것도 이해 못 하는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는 지적 사기이다.”

 

 

일별하기에 맞는 소리인 것도 같다. 첫 머리에 적어놓은 정언 명령 같은 저 문장들은 ‘머리 좋고 배경 지식 풍부한 나 같은 사람이 읽었는데도 주제 파악이 안 될 때’에 나오는 말들이다. 왜 주제 파악이 안 되는가? 자신의 인식의 지평이 어떠한 글이 기반하고 있는 영역을 포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되지 않는 글의 대부분은 사기일 공산이 크다.)

 

 

현상학적 환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현존재 분석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 우선 현상학적 환원을 이해하고 나서 현존재분석을 들여다보든지 해야지, 날로 현존재분석을 씹어먹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남들이 이해 못할 글을 쓰는 것은 지적 사기

남들이 훤히 이해하는 글을 쓰는 것은 지적 태만

 

이제 두 번째 경우를 보자.

 

“이 글은 내 인식의 지평 내에 완전히 포섭되어 모두 이해된다. 이해되는 것을 넘어서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이며 과거에 어떻게 흘러왔는지가 훤히 다 보인다. 그러므로 이 글은 지적 태만의 증거물이다.”

 

글쓴이가 만약, 부단히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자기 자신을 둘러싼 담론의 경계를 뛰어넘기 위해, 세계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글은 그 누구에게도 완전히 이해되지 못한다. 심지어 글쓴이 자신에게도 이해되지 못한다. 글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그 자신의 동력으로 움직여버리는 순간에나, 인간에게 소용이 있는 것이다. 어떤 글이 나의 의식 속에서 완전히 파악되는 순간, 그 글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된다.

 

어떤 글을 읽을 때, 우리가 달아보아야 하는 저울은 바로 이런 것을 기준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절대적인 미지를 포함하고 있느냐? 그리고 글쓴이가 그 미지를 대면하기를 무서워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은 글, 즉 내게 미지의 것이란 없다고 달통한 척하거나, 아무 것도 식별할 수 없게 만드는 컴컴한 어둠이 다가오는 것이 무서워 벌벌 떠는 글을 보는 것만큼 당혹스러운 경험도 없다. 인간의 언어가 신의 언어인 양 행세하고 있으니 어찌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자신이 서 있는 곳,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서 남을 향해 떠들어대고 있으니 어찌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 © 대학신문 사진부

 

 

 

 

 

 

 

 

최현희

인문대 박사과정ㆍ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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