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어독문학과 김태환 교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독일 표현주의 문학의 대표적 문예지였던 「디 바이센 블래터」(Die Weißen Blatter) 1915년 10월호에 처음으로 발표됐고, 같은 해 11월에 쿠르트 볼프 출판사의 『최후의 날』(Der jungste Tag) 시리즈 가운데 한 권으로 출간됐다. 현대문학의 고전 중의 고전에 속하는 이 작품이 이제 출간 백 년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시기는 여기서 몇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카프카는 『변신』을 이미 1912년 겨울에 완성했고, 친구들 앞에서 낭독했다. 그의 열렬한 팬이었던 친구 막스 브로트는 이 충격적인 작품에 대해 쿠르트 볼프에게 알렸다. 볼프는 1913년 초에 카프카에게 편지를 보내 작품 원고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카프카는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작품을 쓴 지 꼬박 3년이나 지난 뒤에야 결국 책이 나올 수 있었다.

카프카의 첫 작품집 『고찰』(Die Betr- achtung)이 1912년 말에 역시 쿠르트 볼프 출판사의 『최후의 날』 시리즈로 나왔고, 이 시리즈가 당시 중요한 젊은 작가들을 대거 끌어들이며 높은 명성을 구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쿠르트 볼프의 출간 제안은 카프카에게 상당히 유혹적으로 들렸을 수밖에 없다. 만일 카프카가 짧은 시간 안에 『고찰』에 이어 『변신』을 같은 시리즈로 출간했다면 카프카는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작품의 결말 부분에 만족하지 못해 망설였다. 우여곡절 끝에 책이 겨우 나온 1915년은 시기적으로도 좋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이 한창 진행 중인 전쟁에 온통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변신』에 대한 평단의 반응도 다소 미온적이었다.

카프카의 망설임은 『변신』의 발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카프카는 자신의 글쓰기 전체에 대해 그런 회의적 태도를 보였다. 물론 『판결』(Das Urteil)처럼 단숨에 완성되고 작가로서 완벽한 충족감을 맛보게 해준 작품도 있었지만, 이는 차라리 예외적인 경우에 속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회의는 카프카로 하여금 결코 장편을 완성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위대한 세 장편소설 『소송』 『성』 『실종자』는 모두 미완성 상태로 남았다. 그나마 중편소설인 『변신』이 그가 완성해 발표한 것 가운데 가장 긴 작품이다. 서양 문학의 전통에서는 정말 중요한 소설가로 인정받는 것은 오직 장편소설을 통해서지만, 카프카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장편소설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될 작품들의 원고를 서랍 속에 묵혀둔 채 짧은, 때로는 극단적으로 짧은 소설들만을 발표했다.

카프카의 망설임은 죽기 전까지 계속됐다. 폐결핵이 악화하면서 카프카는 혹시라도 갑작스럽게 죽을 경우를 대비하여 막스 브로트에게 보내는 유언을 두 차례(1921, 1922) 작성한다. 카프카는 이 유언에서 책으로 출간된 것만을 제외하고 잡지에 실린 글들, 모든 미발표 원고, 모든 편지를 다 찾아 모아서 불태워달라고 부탁한다. 출간된 책을 증쇄하는 것도 금지한다. 브로트는 카프카가 죽은 뒤(1924) 그의 유고 속에서 이 유언을 발견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완벽하게 무시했다. 원고를 불사르라는 카프카 유언의 아이러니는 그것이 바로 카프카 작품의 최대 숭배자, 평생 그에게 작품의 발표를 독촉했던 사람에게 향해 있다는 데 있다. 유언의 내용과 유언의 수신자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이다. 막스 브로트는 자신이 그 부탁을 절대 들어주지 않을 것임을 카프카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느꼈다. 우리는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할 수도 있으리라. 카프카는 유언을 통해 자신이 발표할 수 없었던 원고들을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후대에 전해지게 했다고.

카프카의 죽음은 그가 20세기 최고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의 세계적 명성을 얻는 것을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이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그 자신이 바로 그 장애물이었으니까.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가 죽자 카프카의 부탁과는 정확히 반대로 그의 모든 미발표 작품들, 심지어 그의 일기와 편지까지도 편집, 출간하면서 카프카의 문학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우리는 살아서 세상의 인정을 전혀 받지 못하다 죽은 뒤에야 명성을 얻은 천재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카프카는 사후에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예술가 가운데도 아주 특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의 인정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 (그는 아주 소수의 작품만을 발표했지만 작가와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자기 회의 속에서 작품을 완성하지 않고 발표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명성을 사후로 유예시켰을 뿐이기 때문이다.

『변신』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 카프카 자신은 완전히 만족스러워하지 않았지만 『변신』은 훗날 카프카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 사람들이 카프카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작품이 됐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평범한 세일즈맨이 갑자기 거대한 벌레가 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이 수수께끼 같고 기괴한 이야기에 그토록 매혹됐던 것일까?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를 보았을까?

한 인간이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보니 거대한 갑충으로 돼있더라는 소설의 첫 문장은 독자를 곧장 충격적인 환상과 미스테리의 세계로 데려간다. 그런데 환상소설이라면 주인공은 변신이라는 초현실적 사건의 배후를 점차 깊이 파고 들어갔을 것이고, 이에 따라 변신의 미스테리(그레고르 잠자는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 천형(天刑)을 받았을까?)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전통적 서사의 관습이 불러일으키는 독자의 기대는 전혀 충족되지 않는다. 변신이라는 환상적 사건은 주인공 잠자와 그의 가족들의 일상적 삶 속에 파묻혀버린다. 물론 가족은 불행해지고 그들의 삶은 비극적 몰락의 분위기 속에 빠져간다. 그러나 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불행도 묵묵히 참아 넘길 뿐이다. 불행에서 파생되는 그레고르와 가족 사이의 갈등도 결코 완전한 파국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그나마 주어진 삶을 계속 영위하기 위해 적당한 타협에서 멈추곤 한다. ‘왜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해야 했는가’라는 본질적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레고르나 나머지 가족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모두가 가정의 경제적 미래에 대해 걱정할 뿐이다. 그레고르가 결국 죽었을 때, 남은 가족은 좀 더 나은, 좀 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느끼며 안도한다. 변신은 마치 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나가는 병처럼, 그레고르의 목숨을 빼앗아간 것 외에는 거의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채 과거의 일이 된다.

그러므로 ‘변신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왜 변신이 일어났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잠자 가족이 정말 무서워한 것은 거대한 갑충도, 그러한 변신을 가져온 배후의 힘도 아니고, 자신들의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돈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변신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나 그들에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변신으로 인해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이 사라졌고, 그렇게 발생한 경제적 손실을 어떻게든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이었다. 그것만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자신조차 그런 현실적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에만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레고르는 잠깐잠깐 어떤 저 너머의 것에 대한 꿈, 욕망을 마음속에 느껴보지만, 그것도 결코 오래가지는 못한다.

서양의 근대는 인간을 신의 섭리나 숙명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자연을 지배하고 역사를 진보시키는 주체로 정립하려 했지만, 이미 20세기 초에 이르면 인간은 더는 주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문명이 만들어낸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기능해야 하는 부품 같은 것으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기능해야 했고, 시스템 속의 일개미처럼 변해가는 인간에게 단순한 삶 너머의 이상이나 초월적 의미는 점점 낯선 것이 돼갔다. 그렇다면 벌레로의 변신은 역설적으로 그러한 인간 자신의 비인간화와 주체의 노예화에 대한 자각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변신은 시스템 너머의 상상력에서 발원하는 어떤 신호,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변신이라는 놀라운 사건 앞에서조차 놀랍게도 전혀 놀라지 않고 빚을 갚고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카프카의 인물들은 그러한 자각에서 멀어진 채로 시스템의 맹목적인 노예가 된 인간 자신의 반영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미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에 쓰인 이 작품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모든 삶의 영역을 점점 더 강력하게 장악해가고 그 속에서 더 잘 기능하는 것만이 성공적인 삶으로 간주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경고를 읽어낸다 해도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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