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체제 종식 이후 독재 정권이 설치한 기념물들은 대중에 의해서 철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2011년 재스민 혁명 당시 리비아 반군은 무아마르 카다피의 독재 체제를 사실상 종식시키는 바브 알 아지지야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 카다피의 동상을 비롯한 기념물들을 철저히 파괴했다. 또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은 바그다드를 점령한 이후 현지의 군중들과 함께 사담 후세인의 동상을 철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4·19 혁명이 일어나고 네 달이 지난 1960년 8월에 남산 중턱에 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형 동상이 철거되기도 했다.

◇프랑코 독재의 흔적=그런데 이와는 달리 스페인 곳곳에는 독재자 프랑코가 설치한 기념물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군인 출신으로 스페인 내전에서의 승리를 기반으로 집권한 프랑코는 사망할 때까지 행정권, 입법원, 군사권 등 모든 핵심 권력을 독점했다. 이를 통해 그는 내전 당시의 반대파인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좌파 인사에 대한 사형, 고문, 노동교화소 수용을 단행했으며 반정부 성향의 정치 단체, 언론, 노동조합을 해산시켰다. 그의 정권 치하에서의 사망자가 최소 20만명 이상, 망명자는 25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는 1975년에 자연사했고 이후 스페인은 민주화됐다. 그러나 프랑코 정권 최대의 기념물인 ‘전몰자의 계곡’(El Valle de los caidos)(사진①)은 지금도 사실상 프랑코의 능(陵)으로 쓰이고 있다. 또 히틀러의 ‘퓌러’나 무솔리니의 ‘두체’처럼 프랑코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된 ‘카우디요’라는 이름의 마을들을 아직도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남부 지역의 도시 멜리야에는 여전히 그의 동상이 설치돼 있기도 하다.

이런 기념물들은 스페인 대중이 공유하고 있는 집단기억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의 터’로서 기능하고 있다. 기억의 터는 프랑스의 역사가 피에르 노라가 고안한 개념으로 공동체의 집단기억을 보존, 구축하는 상징적 이미지이며 구체적인 예로 기념물, 기념일, 제도, 교과서 등을 들 수 있다. 개인은 이런 기억의 터가 환기시키는 기억을 스스로의 기억으로 내재화하며 다수의 개인이 하나의 기억의 터를 공통적으로 접할 때 개인의 기억은 집단기억이 된다. 즉 노라의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독재자가 설치한 기념물은 독재자의 의도에 따라 대중들의 집단기억을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독재 체제를 무너뜨린 대중이 기념물을 파괴하는 이유는 그것의 기능을 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거나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스페인이 과거 프랑코 정권과 단절된 체제라면 이런 기억의 터들은 오래전에 제거돼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 프랑코 체제가 종식된 지 40년이나 지난 스페인에서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직접 찾아가 본 프랑코의 능(陵)=이 물음의 단서를 찾기 위해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54km 떨어진 프랑코 정권의 가장 대표적 기념물인 전몰자의 계곡에 찾아갔다. 전몰자의 계곡은 전몰자(戰歿者), 즉 내전에서 사망한 좌우파 모두의 유해를 안장함으로써 그들을 추모하고 국민화합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프랑코가 직접 구상한 기념물로 십자가, 무덤, 성당, 수도원이 포함된 복합 건축물이다. 그 성당의 폭은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성베드로대성당과 같은 260m, 성당 위에 놓인 십자가의 높이는 152.4m에 달한다. 이 십자가는 약 50km 정도 떨어진 버스에서도 볼 수 있었다. 전몰자의 계곡으로 운행하는 버스는 하루에 한 대뿐이었지만 거대한 규모, 추모 공간이라는 특성이 만들어내는 그 곳의 독특한 분위기에 이끌려 찾아온 다수의 관광객을 볼 수 있었다.

▲ 사진① 전몰자의 계곡. 스페인 마드리드 북서쪽에 위치한 해발 1,000m의 과다라마 산맥 남쪽 기슭의 바위산을 뚫어서 만든 복합 기념물이다. 주요 시설물로는 묘지, 지하 성당, 산책길, 폭 100m의 화강암 계단, 12m 길이의 피에타 조각상이 있다.

전몰자의 계곡은 설립 명분과 다르게 사실상 프랑코의 능으로 쓰이고 있다는 비판을 계속 받고 있다. 내전 사망자 중 그 누구의 이름도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안장된 유해의 수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름이 새겨진 묘비의 주인공은 프랑코의 지지 세력이었던 팔랑헤의 창시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와 프랑코뿐이다. 프랑코의 묘비가 전몰자의 계곡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공간이었으며 그의 묘비 위에는 꽃이 놓여 있었다. 이 때문에 프랑코 체제를 그리워하는 일부 극우 세력들은 프랑코의 기일마다 이곳에 모여서 집회를 하기도 한다.(사진②)

둘러보던 외국인 관광객들은 프랑코의 묘비를 보면서 혀를 차는 등 전몰자의 계곡의 존재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독일인 관광객은 현지 가이드에게 “나는 프랑코가 왜 이곳에, 이런 식으로 묻혀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스페인 사람들이 아직도 프랑코를 좋아하는 것입니까?”라며 반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현지 가이드는 사뭇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다수의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코의 통치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곳이 존재하는 데에는 복잡한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고 답했다.

그의 말처럼 스페인 국민들은 프랑코의 통치가 정당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페인의 유력 일간지 「엘 문도」가 2005년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자의 51.2%가 프랑코의 이미지가 ‘나쁘다’ 혹은 ‘매우 나쁘다’고 답했다. 지난 4월에는 스페인의 왕립역사학회가 인명사전에 프랑코를 독재자로 기술하기로 결정했다. 버스터미널에서 받은 전몰자의 계곡 공식 안내 책자에서도 이런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안내 책자에는 숨겨야 할 무엇인 것처럼 프랑코와 관련된 어떤 서술도 없이 전몰자의 계곡의 크기, 위치 등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있었다. 그렇다면 앞서 가이드가 말한 ‘정치적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 사진② 프랑코 사후 30주년이었던 2005년 당시 전몰자의 계곡에서 파시스트식으로 경례를 하고 있는 프랑코 지지자의 모습이다. 중앙일보 출처.

◇불가피했던 ‘망각협정’, 그리고 균열=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우선 1975년 프랑코 사망 직후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대학생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민주화로의 이행을 바라는 세력이 크게 성장해 있었다. 1961년부터 1975년까지 스페인은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국가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스페인 국민들의 생활수준, 지식수준은 크게 높아졌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세속적, 민주적, 도시적 가치를 수용해나갔고 대학생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점차 정치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코의 사망을 계기로 이들은 더욱 거세게 민주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군부를 비롯한 프랑코의 세력은 여전히 국가의 중심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광범위한 지지층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민주화 세력을 과거와 같이 쉽게 탄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 세력의 요구가 쉽게 관철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처럼 두 세력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이들이 선택한 것은 ‘망각협정’(Pacto del Olvido)이라는 이름의 타협이었다. 기존 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로 이행하되, 독재 체제의 과오와 관련된 기억과 역사를 ‘망각’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따라서 프랑코 세력은 어떠한 사법적, 정치적 책임도 지지 않았으며 이 후에 정치적 영향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참혹했던 내전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던 스페인 국민들은 내전이 재발할까 두려워 망각협정을 용인했다. 이 시기에 격화된 정치적 갈등은 많은 사람들에게 내전 발발 직전의 정치적 갈등을 떠올리게 했으며, 실제로 정치테러와 시위가 급증했다. 프랑코에 의해 억압당했던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도 정치적으로 각성됨에 따라 지역 갈등이 불거질 조짐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 국민들은 정의 구현보다는 평화와 질서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결국 스페인의 민주화는 독재 체제 내의 온건파의 주도 하에 좌파 민주화 세력이 협력해 이뤄졌기 때문에 과거와의 단절이 없었다. 김원중 강사(서양사학과)는 논문 「청산없는 청산: 프랑코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에서 “그런 상황에서 과거와의 갑작스런 단절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기존 체제의 틀 내에서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개혁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바로 이 점이 스페인의 민주화 혹은 과거청산의 성격을 규정한 결정적인 요인이라 할 것이다”고 밝혔다. 피를 흘리는 극단의 대립을 막기 위한 망각협정 선택은 불가피한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전 및 독재 피해자들은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소외됐다. 결국 프랑코 체제는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기억의 터 또한 남아있게 됐다.

망각협정 이후 스페인은 성공적으로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민주화가 될수록 역설적으로 망각협정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민주화 체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됨에 따라 더 이상 정치적 갈등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내전과 독재 피해자들의 기억이 차츰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2000년대 들어 가속화됐으며 ‘프랑코독재희생자가족회’ ‘프랑코체제반대투쟁복원회’ ‘역사적기억복원회’ 등의 단체들이 프랑코 체제에 대한 처벌, 독재 피해자들에 대한 인정과 보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프랑코 체제의 문제에 다시 주목하게 됐고 정치권은 국민들의 여론에 호응했다. 의회는 2002년 프랑코의 쿠데타를 ‘헌정 질서를 파괴한 행위’로 규정했으며 2007년에는 ‘역사기억법’을 통과시켰다. 내전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을 확대하고 공공시설에서 프랑코 시대의 상징을 제거하는 내용을 담은 법으로 과거청산을 법적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 받는다.

스페인의 국민들은 프랑코의 잔재를 느리지만 꾸준히 정리해나가고 있다. ‘망각’에서 깨어나 무엇이 정의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역사는 잊기로 정한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한국사의 부끄럽고 부정했던 순간들을 망각하려는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랑스럽고 올바른 역사’만을 기억하려는 시도가 그릇되고 헛된 것임을 프랑코 독재 역사가 스러지는 과정이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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