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어국문학과 김윤진 박사과정

일촌평이 사라졌다. 방명록도 없어졌다. 이제 보고 싶어도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글들이 돼버렸다. 얼마 전 싸이월드의 일부 서비스가 종료된다는 사실을 나는 실시간 검색어를 보고 나서야 뒤늦게 실감했다. 더 늦기 전에 백업을 받아야 했다. 종료 기한을 3분 남기고 부랴부랴 접속했지만 이미 서버는 다운되어 버린 뒤였다. 곧 허무감이 밀려들었다. 글에 담긴 기억들도 함께 증발해버린 것 같아 문득 서글퍼졌다.

2013년 종료된 프리챌 커뮤니티를 통해서 이미 한 차례 경험했지만 한때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홈페이지, 혹은 그 일부를 떠나보내는 일은 여전히 익숙지 않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특정한 누군가를 탓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추억을 전시할 공간을 제공하고 수익을 얻은 기업들이 문제일까. 홈페이지에 남긴 추억은 영원하리라는 안일한 환상을 기쁘게 받아들였던 내가 문제였을까. 우리는 웹상에서 추억들이 머물 수 있는 보다 안정적인 저장소를 찾아다니며 추억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다. 그러나 존립 여부가 오롯이 이윤에 달린 기업에 우리의 추억을 내맡긴다는 발상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사전』에서 현대인류를 유목민에 비유했다. 이른바 디지털 유목민은 전자기기를 휴대한 채 인터넷에 접속하여 필요한 정보를 찾고, 그 정보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유토피아적 전망이 담긴 말이지만 개인 정보의 유지와 관리라는 면에서는 ‘추억’이라는 봇짐을 지고 사이버 세계에서 유랑하는 우리네 신세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 씁쓸하다.

추억이 온전하게 우리의 것으로 저장되고 기억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방법을 강구하기 전에 우리가 일상을 대하는 태도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순간들을 맨몸으로 감각하는 대신, 우리는 각종 전자 기기들을 응시하면서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단조롭게 읊조릴 뿐이다. 이렇게 저장된 추억들이 과연 삶을 제대로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추억’을 인터넷상에 저장해야 할 ‘자료’로 간주한다면 (실제로 싸이월드는 일부 서비스의 종료를 알리면서 “중요한 자료들은 백업 기간 내에 백업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다소 밋밋하게 표현했다) 삶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추억의 파편들은 일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우리는 홈페이지의 서비스가 종료됨에 따라 추억 또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추억은 화면 속에서 명멸하는 몇 바이트의 글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감각과 기억 안에 잠재된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추억은 순간을 맨몸으로 받아들이는 씨줄과 이를 보다 견고하게 붙잡아두려는 열망의 날줄로 얽히는 것일 터. 그리고 이때 추억을 현실로 불러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매개는, 따스한 목소리와 너그러운 눈길로 가동되는 사람 간의 관계망일 것이다. 결국, 우리의 추억을 옮긴 사람은 없다. 무질량의 매체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보다는 삶이 주는 생동감을 매 순간 느끼며 기억하자고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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