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윤 학술부장

‘정치적’인 학생에게 쏟아지는

‘올바른’ 어른들의 비난

각자도생하는 우리의 모습은

학창시절 경험의 흔적은 아닐까

교복이 눈에 띄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광장에는 앳된 얼굴이 서있었다. 비를 맞으며 ‘올바른 역사를 물려 달라’는 팻말을 든 학생은 섬처럼 광화문 중앙에 붙박인 채 시민들이 건네준 우비에 의지하고 있었다.

지난 3일 확정 고시 이후에도 여러 청소년들이 한국사 국정화 반대 집회에 참여해 자유발언을 하거나 행진에 참여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학내에 한국사 국정화에 반대하는 자보를 붙이거나 자발적으로 청소년행동 조직을 만드는 등 작금의 상황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한 학생들은 역설적으로 활발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선 반대하는 의견을 모으자는 포스트잇을 부착한 학생들에 대한 징계위가 개최될 것으로 알려졌다. 학교 기물 파손과 학생 선동이 이유였다. 집회 현장에서도 ‘올바른’ 어른들이 찾아와 어린 학생들에게 삿대질을 마다치 않았다. 교실에 있어야 할 너희가 왜 정치판에 끌려왔냐는 꾸지람이 이어졌다.

청소년은 정치로부터 자주 소외돼왔다. 대개 그들은 어리기에, 휩쓸리기 쉬운 존재이기에 자신에게 해당되는 일에조차 발언권을 인정받기 어렵다. ‘공부하기 싫어 헛바람이 들었다.’ 지금 시국에 대해, 하물며 자신의 순응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조차 딴 짓을 하려는 핑계 정도로 취급받곤 했다. 어떤 논쟁을 해보기 전에 일단 학생의 본분을 다하라는 판결이 자연스럽고 현실적이라 여겨지는 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학생다움’이란 지금 주어진 교육환경에 적응하는 것뿐일까. 영문도 모르고 거쳐 온 공교육의 현장은 위로부터 내려진 내용을 토씨 하나 다름없이 익히라고 다그치는 듯했다. 선생님,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열심히 학업에 충실해 좋은 대학에 가는 것. 솔직히 그 외에 ‘아직 판단력이 미숙한’ 학생들에게 허락된 칭찬을 찾긴 쉽지 않다.

이 모든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청소년이 학생이자 한 명의 시민이라는 걸 포착하긴 쉽지 않다. 이 사회에서 시민이 된다는 걸 고민해보기도 전에 청소년은 어리숙하다는 단정과 외워야 할 단어장에 매몰된다. 고3이니 다른 활동을 다 그만두라고 권고하는 경우도 적잖으니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청소년들만 빗겨가는 건 어려울 것도 없어 보인다. 허나 “다 너희를 위한 것”이라는 말은 얼마나 자주 그들을 ‘학생다운’ 세상에 가둬왔던가. 자신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에조차 목소릴 내기 어려운 그들의 권리는 ‘좋은 대학’에 간 후에야 인정받을만한 가치일까.

교육과 청소년에 대한 태도는 그 나라가 맞이하게 될 시민의 상을 보여준다. 1976년 서독의 좌우 진영은 ‘보이텔스바흐협약’을 통해 주입식 교육을 금지하고, 정치적인 논쟁을 그대로 전달하며 학생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시민이 되도록 육성한다는 정치교육 원칙을 세웠다. 분명 성숙한 시민이 ‘뿅’ 하고 생길 리는 만무하기에 교육의 차원에서 여러 고민이 이뤄질 터. 주입식 교육을 점차 바꿔나갈 생각 없이 도리어 학생들도 ‘붉어질’까봐 하나의 ‘올바른’ 교과서로 가르치자는 발상은 청소년인 학생들이 시민이 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못하거나, 안 하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교복을 벗어난 후에도 계속 정치에 무관심한 채 각자도생하게 된 우리의 자화상을 본다. 사회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무력함은 어떤 경험의 흔적일까. 자유와 책임보다 규제에 익숙해야만 했던 학창시절은 내게 무엇을 남겼을까. 청소년이 그 사회를 구성할 시민 개개인의 첫 단계라면 비에 젖어 초라해져도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어린 학생들이 오히려 소문만 무성하던 ‘민주사회 속 시민’의 문턱에 더 가까운 건 아닐까. 그리고 문득, 얼굴이 붉게 달아오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교복은 우리가 겪었던 것보다 훨씬 ‘무거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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