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판소리 배우는 동아리 '추임새'

“공명이 재주가 있다 허나 자나 깨나 죽나 사나 동정을 보아 제명에 죽기 싫으면 응당 나올 터니…”

판소리 소리꾼 네다섯 명의 쩌렁쩌렁한 창이 새어나오는 어느 동아리방. 판소리 ‘적벽가’ 가운데 유비가 제갈공명을 찾아가 삼고초려하는 장면이 이곳 판소리 배우는 동아리 ‘추임새’의 교실에 펼쳐졌다. “제갈공명이 하도 집에서 안 나와서 장비가 화를 내는 장면이거든요. 그 감정을 더 잘 표현하면 좋겠어요.” 판소리 전공생 박수범 씨(국악과·14)가 능숙하게 시범을 보이자 앞에 앉아있던 학생들은 장단에 맞춰 고개를 흔들며 열심히 따라 부른다.

▲ "판소리는 목소리만 사용하면 되는 예술이에요." 목청 높여 '적벽가'의 한 대목을 부르는 추임새 사람들.

추임새는 오래전 판소리를 좋아하는 관악인들이 모여 만들어졌지만 한참동안 활성화되지 못했다. 학생운동 시절 추임새를 만든 학생들은 판소리의 가사를 바꿔 민주화를 노래했고, 외부에서 전문가를 초청해 판소리를 전수받았다. 하지만 판소리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을 대변하듯 이후 추임새를 찾는 발길은 점점 줄어들었다. 몇몇 판소리 전공생들이 명단에 이름만 올렸을 뿐 별다른 활동 없이 동아리방은 비어 있었다.

2년 전만 해도 활동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던 추임새가 지난해 초 한사람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당시 회장이었던 신유진 씨(국악과·12)는 전공자로서 대중들에게 판소리를 두루 알리는 것을 꿈꾸며 그 첫걸음으로 추임새를 되살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저 활동 계획을 세우고 동아리방을 청소하는 등 동아리로서 구색을 갖췄다. 신유진 씨는 “사람들을 초대하려면 청소부터 해야겠다 싶어서 정리를 시작했는데, 나온 짐이 동아리방 절반은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회상했다. 캠퍼스 곳곳에 전단지를 뿌리고, 동아리 소개제에 부스를 마련하는 등 적극적으로 홍보도 했다.

신유진 씨의 노력에 보답하듯 최근엔 다양한 학생들이 추임새 동아리방 문을 두드리고 있다. 판소리 전공생 3명이 판소리를 전수하는 사부를 자청하며 추임새에 참여했다. 박수범 씨는 “나중에 우리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될 텐데, 그걸 미리 경험해 볼 수 있다”고 참여동기를 이야기했다.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도 하나둘 찾아와 10명 가까이 모였다. 원래부터 국악을 좋아했다는 배현지 씨(간호학과·14)는 “난생 처음으로 좋은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함께 하고 있는 느낌”이라며 동아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제 막 추임새의 일원이 된 박동선 씨(국어국문학과·11)는 “판소리의 구성진 음이 대중가요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보다 훨씬 개성이 있다”며 “색다른 미적 체험이 됐다”고 첫 수업의 소감을 전했다.

추임새의 수업은 사부 한 명과 제자 한두 명이 짝을 이룬 뒤 정해진 교본 없이 입에서 입으로 노래를 주고받는 식으로 진행한다. 이러한 구전 방식은 사부들이 자신의 선생님들로부터 전수받은 방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제자들은 사부의 시범을 듣고 소리 내어 따라하거나, 자신이 파악한 음과 장단을 다양한 모양의 선으로 표시해가며 소리를 익힌다. 배지현 씨는 “노트에 그날 배울 가사를 적고, 본인만 알아볼 수 있도록 높낮이를 느낀 대로 표시한다”고 자유로운 판소리 익히기 방식을 설명했다.

추임새 제자들의 열의는 전문적인 소리꾼들 못지않다. 배현지 씨는 “수업시간 사부님들의 시범을 녹음해서 틈날 때마다 듣다보니 실력이 저절로 늘어있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판소리에 젖어 지내다 보니 제자들은 전공생들도 어려워하는 대목들도 척척 소화해 낸다. ‘수궁가’ 중 ‘약성가’는 긴 나열식 가사에 7~8분 동안 빠른 장단으로 쉼 없이 달려 나가듯 불러야 해 매우 까다로운 대목이다. 박수범 씨는 “가사가 길고 많다 보니 어려워 할 거라고 여겼는데 완벽하게 외워서 깜짝 놀랐다”고 제자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드러냈다. 최근엔 가락으로 극을 표현하는 것에 더해 가사에 맞춰 하는 몸짓인 ‘발림’을 익히기도 했다. “몸치이다 보니 부채를 펴고 접고 올리는 단순한 동작들도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털어놓은 배현지 씨는 꾸준한 노력 끝에 발림과 가락을 하나로 어우를 수 있었다.

지난 6월 풍산마당에서 열린 작은 공연에서 추임새 제자들은 갈고 닦은 실력을 뽐냈다. 사부들은 고수가 돼 북장단을 맞췄고 제자들은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극을 설명하는 아니리와 본격적인 노래인 창까지 모두 불렀다. ‘춘향가’의 ‘쑥대머리’를 선보인 배현지 씨는 “부르다 보면 춘향이의 임을 그리는 마음에 공감이 돼 춘향의 감정에 푹 빠져들어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판소리는 소리꾼 혼자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의 추임새는 소리꾼의 창 못지않게 판소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추임새로 신이 난 소리꾼은 보다 신명나고 흥이 넘치는 가락을 관객에게 들려준다. 판소리로 모인 추임새 사람들도 함께 장단과 소리를 나누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같이 “얼씨구!”를 외치며 가락에 흥을 더할 때,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즐겁다.

 

사진: 김여경 기자

kimyk37@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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