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수원 편집장

인터넷에서 시작된 ‘죽창’ 열풍

노력 신화 부정하는 심리의 투영이지만

확대되는 불평등의 죽창 아래

서로를 잘못 겨누지 않아야

 

올해 인터넷을 돌아보면 현재 우리 사회에 대해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함의를 보여준 유행어가 참 많았던 것 같다. 몇몇은 랜선을 넘어 국정감사 현장에서 높으신 분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며 언론에서도 워낙 자주 다뤄져서 식상할 정도가 됐다. 이처럼 인터넷에서 청년들 사이 유행한 불온한 유머 코드들 중 ‘올해의 유행어’를 뽑는다면, 본인은 주저 없이 죽창(竹槍)을 고를 것 같다.

“금수저든 은수저든 죽창 한 방이면…!” 인터넷 상에서 죽창을 찾을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문구다. 2000년대에 떠돈 어느 조악한 퀄리티의 인터넷 만화에서 빌려온 대사에 2015년의 ‘수저계급론’이 접목되는 순간 네티즌들은 “죽창 앞의 평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의 평등이냐면, 부유하든 가난하든 누구나 죽창에 한번 ‘푹-!’ 찔리면 죽는다는 것이다. 육신이 관통된다는 가학적 이미지의 블랙 유머를 두고 누군가는 섬뜩해 마지않고 누군가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곧이어 ‘죽창열풍’의 기저에 깔린 청년들의 심리가 무엇인지 논하는 무수한 분석이 쏟아졌다.

죽창 앞의 평등이 회자되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로 노력 신화에 대한 열렬한 부정이 지적된다. 점점 둔화되는 잠재 성장률, 고스펙 대졸자들도 피해갈 수 없는 10%에 육박하는 청년 실업률, 1년 이하 계약직으로 사회에 발을 내딛는 청년이 5명 중 1명에 달하는 현실의 지표들이, 왜 80%에 달하는 20대가 ‘개개인이 열심히 노력해도 계층상승 가능성이 낮다’고 답하는지(현대경제연구원)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편, 조금만 눈을 돌리면 ‘조물주 위 건물주’의 일상을 요약한 인포그래픽이나, 하루아침에 1천억원대 주식 부자가 된 어느 제약회사 회장 손주들의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죽창이 관통해야 할 대상으로 날 때부터 물질적으로 풍족했던 금수저나 은수저가 지목된 것은 이런 맥락으로 풀이되곤 했다.

그런데 ‘죽창드립’이 사용되는 맥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뭔가 수상하다. 예를 들면 커뮤니티 사이트에 커플의 달달한 연애 스토리가 올라오면 “죽창, 주욱창을 달라”거나 “제아무리 커플이라도 죽창 한 방이면!”과 같은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단지 질투를 과격하지만 재밌게 표현한 것에 불과할까? 경제적 문제로 ‘연애’나 ‘결혼’ 등을 포기하는 ‘N포세대’라고 꼬리표가 너무도 쉽게 붙는 우리 세대가 당면한 현실과는 무관한 반응일까? 이유야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죽창을 들어야 할 대상이 단순히 부유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확대될 수 있음을 방증한다.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점점 더 성취할 수 없게 되는 현실의 불공평함을 토로하면서 인터넷에 죽창이 등장했음을 고려하면, ‘누구에게나 평등한 죽창’이 해결해야 할 불평등의 외연이 늘어나는 현상은 사실 전혀 놀랍지 않다. 우리 사회의 온갖 영역에서 양극화가 일어나는 현실을 고려할 때 건강한 사람,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사람, 충분한 교육을 받는 사람 등에게도 죽창이 필요하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조만간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죽창 앞의 평등이 모든 영역에서 필요해진 지극히 불평등한 미래를 상상해보자. 결국 그것은 모든 종류의 파이를 놓고 너, 나, 우리가 서로에게 죽창을 겨누는 사회, 즉 각자도생에 갇힌 현재 한국사회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찔러 죽여도 불평등 그 자체는 미결일 것이며, ‘죽음’이라는 죽창 앞의 평등은 내가 죽기 전까지 나를 결코 빗겨가지 않을 것이다.

저마다가 마음속에 날카로운 죽창을 하나씩 품고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요즘이다. 혹자는 오늘도 속으로 불평등을 상징하는 누군가를 죽창으로 꿰뚫어버리는 ‘유쾌한’ 상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리하게 깎아놓은 죽창이 향해야 하는 것이, 단지 곁에서 함께 불평등한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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