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것은 용서하나 퍼뜨리지 말라”

▲ © 강동환 기자

 

조선시대에는 왕조체제를 위협하는 내용을 담은 서적이 금서가 됐다. 국가이념이었던 유교 외의 사상을 철저히 배척했던 조선 건국 초기에는 도교 관련 서적을 금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교사상이 사회적 혼란이나 천재지변을 왕조교체와 결부시키고 있어 정치적으로 변란에 이용될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 조선 후기와 말기에는 평등사상 등 지배체제에 위협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성찰긔략』 등의 천주교 서적과 『용담유사』 등의 동학 서적이 탄압을 받았다.

 

『한국사 이야기』시리즈의 저자 이이화씨는 “조선은 왕조 초기에 체제를 전복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모두 불태웠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조선 초기 금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구전과 필사를 통해 민간에 전해진 내용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예가 도참설에 근거해 조선왕조가 망하고 정씨왕조가 세워진다는 내용을 담은 조선 후기의 『정감록』이다. 『정감록』에는 불평등한 사회구조 타파와 왕조교체 등 역성혁명사상이 구체화돼 있어, 조선 후기 식자층이 일으킨 대부분의 변란에는 『정감록』의 사상이 민중 동원의 수단으로 이용됐다. 이에 영조 때 일어났던 무신의 난을 계기로 『정감록』류의 서적의 금지와 금서 전파자에 대한 처벌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감록』에 대한 금압은 비교적 유연하게 이뤄져 책을 유포시켜 변란을 일으킨 자에 대해서는 교수형에 처하는 등 엄하게 처벌했으나, 단순 소지자에게 관대했고 대대적인 압수나 수색도 없었다.

1997년, 조선 중기의 학자 이문건이 쓴 생활일기인  『묵재일기』의 낱장 속면마다 기록돼 있던 최초의 한글소설 채수의 『설공찬전』은 중종반정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금서가 됐다. 『설공찬전』은 당나라의 신하인 주전충이 반역을 일으켜 왕이 됐으나 죽어서는 지옥에 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연산군을 숙청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과 그에 가담한 신흥사림파를 주전충에 빗대어 비판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인 채수에게는 파직 처분만 내렸는데, 이는 책이 내포하는 ‘윤회화복설(輪廻禍福說)’이 퍼지는 것을 막는 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금서의 유포를 무조건적으로 금지하고 저자를 사형에 처했던 서양 중세의 금서 정책과 대조된다.

 

한편 『소학』은 제도적으로 금지된 책은 아니지만 집권세력에 따라 사회에서 금지되기도 하고 권장되기도 했다. 『소학』은 사림파의 이념서로 가정과 사회의 윤리를 제시하는 성리학 교화서였다. 사림파는 그들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소학』을 향촌 사회에 널리 보급하고자 했는데, 기묘사화를 계기로 사림파의 세력이 위축되면서 『소학』도 사회적으로 금기시됐다. 그러나 선조가 왕이 되자 기묘사화 때 처단됐던 조광조가 복권되고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오히려 사회적으로 권장됐다.

 

조선시대의 금서는 정치적, 종교적 이유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기시됐던 소재를 다룬 경우에 금서로 지정됐다는 면에서 서양 중세의 금서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반면 조선시대의 금서 정책은 권력자가 일방적으로 금서를 지정하고 극단적으로 처벌했던 서양 중세와 큰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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