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소영 (국어국문학과 석사졸업)

나는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10년 동안은 오롯이 문학을 공부하는 데 집중하기로 결심했었다. 석사논문만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달려온 지금, 어느덧 2년 반의 시간이 지났고 내 손에는 메달처럼 석사논문 책자가 들려 있다. 그런데 과연 메달인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다. 석사논문을 훑어볼수록 메달보다는 비어버린 물병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학문의 출발선에서 나는 읽고 쓰는 일에 대한 자신감과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물병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석사논문을 쓰는 매순간은 끊임없이 나를 비워내는 과정이었다. 석사논문에 나는 내가 그동안 쌓았던 모든 지식들을 쏟아 부었고,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모든 아이디어를 집어넣기 바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별개로 결과물은 계속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자신감 대신 자괴감에 휩싸이기 일쑤였으며 열정은 식어 버리고 그 뒤에 찾아오는 무력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언젠가 읽었던 류시화 시인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유대교 신비주의 종파인 하시디즘(Hasidism)의 현자들이 전하는 일화인데, 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과 한자리에 원을 그리고 모여 앉아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은 모두 배꼽을 잡고 웃는다고 한다. 그 일들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일들에 대한 자신들의 반응이 터무니없이 심각했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언젠가는 모두가 죽을 운명인데 그것을 잊고 사소한 일에 흥분하고 화내며, 영원히 살 것처럼 작은 것들에 집착했었다는 사실에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그때 그들은 삶이 ‘놀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하시디즘의 현자들은 이 배움을 얻지 못한 영혼들은 다시 같은 수업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그 수업을 다시 받고 있는 중인 것이다.

종이 낭비만 하고 있다는 괴로움에 석사논문이고 문학이고 모두 다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나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만의 ‘10년 버전’으로 바꿔 상상하곤 했다. 10년 후, 나는 대학원 생활의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동료들과 한 자리에 모인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대학원 생활 내내 마음 졸이면서 좌절했던 모든 일들이 아름답게 채색된다. 친구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리포트를 완성했던 순간, 수업 시간에 미니 심포지엄을 개최하기 위해 동기들과 동분서주했던 기억, 세 시간마다 음식을 섭취하는 자신만의 ‘밤 새기 노하우’를 터득한 선배가 나눠 주는 샌드위치를 먹었던 새벽, 석사 논문 주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나 “너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야”라고 했던 선배의 말……. 내가 혼자라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10년 후 우리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될 만한 일들을 떠올렸다. 이런 상상을 하다보면 내 자신이 다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시디즘의 현자들이 이야기했던 삶을 놀이로 생각하는 경지에 아직 나는 다다르지 못했다. 그렇다고 석사논문을 쓰면서 아무런 깨달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년 반의 시간 동안 추억을 쌓는 한편으로 내가 가장 절실하게 깨우쳤던 것은 공부는 혼자의 힘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석사논문이 바로 그 사실을 증명한다. 보잘것없는 내 석사논문에도 여러 사람들이 엮여 있다. 동료들의 따스하면서도 예리한 조언을 통해서 나는 내 글에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는 법을 익혔다. 문학(文學)이라는 것이 글을 글로써 다루는 학문이기에 앞으로 계속해서 글을 읽고 써야 하는 나에게 내 글과의 객관적 거리는 항상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다. 나는 동료들의 애정이 깃든 도움 덕분에 소설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

흔히 석사논문을 쓰고 나면 허무해진다고들 한다. 그러나 비워냈던 내 물병을 채우고 있는 것은 허무함이 아니라 감사함이다. 그래서 처음 세상에 내놓은 글치고는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졸업식을 앞두고 나는 또다시 새롭게 출발선에 선 느낌이다. 10년 후의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걸음 내딛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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