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준 (응용생물화학부 학사졸업)

나는 항상 도망쳐 나오듯 졸업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초, 중, 고등학교 졸업식은 항상 그랬다. 교육 환경이 좋지 못했던 초등학교를 떠나 더 나은 학군으로 도망치듯 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생 때는 공부에 온 신경을 쏟아버린 나머지 교우관계가 좋은 편이 아니었고, 졸업식 날의 나는 부모님을 재촉해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별다른 노력 없이 성적이 많이 올라 비교적 편안한 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나는 학교의 체제에 반항하는 학생이었고, 그것을 혐오하는 학생이었다. 융통성 없는 규칙들로 나를 지독히 괴롭힌 학교를 등지며 마치 감옥을 출소하듯이 나는 그렇게, 통쾌하게 그곳을 떠났다.

난 여전히, 그리고 또 도망치듯 교문 밖으로 나선다. 4년 전, 호기로움에 가득 차 이 곳에 들어왔지만 교문을 나서며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부끄러움’이다. 학자를 꿈꾸며 당차게 서울대학교에 발을 디뎠지만, 내가 깨달은 것은 나는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배운 거의 전부다. 4년 내내 전공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지만 누군가 내게 “응용생명화학전공에서는 뭘 배웠나요?”라고 물으면 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다. 시험 직전에 급하게 눈에 발라만 놨던 전공지식들은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며, 이 글에서도 보듯이 내 생각 하나 멋들어지게 써내지 못한다. 또 국내 최고의 교수님들 앞에서 ‘모든 과목을 독학으로 공부했던 고등학생 때의 공부 방식에서 벗어나,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강의를 듣겠다’는 목표도 전혀 이뤄내지 못했다. 학교도 잘 나가지 않고 시험기간에 급하게 공부를 했다. 진로를 바꾸고자 한다고 말씀드렸을 때 묻어나온 부모님의 아쉬운 표정 앞에서도 난 내 부끄러움을 봤다. 공부는 솔직히 재미없었고 나는 그 앞에서 미적지근하게 굴었다. 그렇게 난 뭉그적뭉그적 거리다가 나쁘지는 않은 적당히 높은 학점과, 한 학기 휴학을 했음에도 뒤처지는 것이 불안해 꾸역꾸역 채워들은 7학기를 양손에 들고 조기 졸업한다.

난 그런 사람이다.

남들보다 늦는 것이 싫어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해외 교환학생은 엄두도 내질 못했다. 당차게 들어갔던 벤처회사는 결국 흐지부지 나오게 됐다. 2학년 때는 보증금이 없어 자취를 하지 못했고, 학내 동아리 방에서 약 5개월 정도 지냈다. 경제적 결핍의 반발심으로 대학생활 내내 무리하게 과외를 잡아 월 250만원까지 벌어봤고, 그걸 한순간에 써 버리면서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밤늦게까지 일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내 가슴에는 또 부끄러움이 쌓여갔다. 반복되는 자기혐오 때문에 나를 찾아주는 친구들에게도 내가 받는 만큼의 사랑을 주지 못했다. 앞에선 내 능력으로 내가 여기까지 해냈다고 열을 올리며 얼굴을 붉히고, 뒤에선 한없는 무력감과 결핍을 느꼈던 것이 내 부끄러운 대학생활의 솔직한 감상이다.

하지만 난 이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남기지 않으려 한다.

난 앞으로 이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난 내 크기를 인정하기로 했다. 어릴 적 나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내가 조조를 닮았다고 했다. ‘간웅’이라 비난받는 조조처럼 그릇이 작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어린 나는 왜 유비나 제갈공명이 아니냐며 아버지께 화를 냈었다. 난 꼭 세상의 주인공이 돼야만 했다.

이제 나는 내 크기를 인정한다. 난 이곳의 주인공이 아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내 크기를 재고 앉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느낀 부끄러움을 발판삼아 난 내 그릇에 더 멋진 것들을 담을 것이다. 나는 이제 고등교육기관을 벗어나는 하나의 성인으로서, 내 역할을 다하며 지성을 갖춘 사회인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내 부끄러움 앞에서 우물쭈물하며 그것들을 쌓고만 있지 않고 담담하게 그것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내가 행하고 목표하는 모든 것들에 난 초연하지만 당차게 첫 발을 내딛으려 한다.

내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준 서울대학교에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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