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불타고 있는 한국 노동운동의 효시




 


1970년 11월 13일 동대문 평화시장 앞길,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던 한 청년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은 성장지상주의가 당연시되던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한국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학생 운동가들은 야학과 위장 취업을 통해 노동자의 의식 고취와 노동조합(노조)결성을 도왔다. 전두환 정권 말기에는 노조가 급증했고, 1985년에는 구로공단 9개 사업장에서 7천여 명이 ‘노동 3권 쟁취’를 요구하며 최초의 동맹 파업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 © 노신욱 기자

1987년 7월, ‘민주노조 건설, 임금 인상’을 요구한 ‘노동자대투쟁’후 노조는 2천 7백여개에서 4천 개로 급증했고, 두자리 수 이상 임금이 인상된 사업장도 있었다. 정용욱 교수(국사학과)는 “1987년 민주화로 노동자들의 분배요구가 정당하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1997년, 정부는 IMF의 요구를 받아들여 정리해고를 허용했다. 경제가 회복된 후에도 노동자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정부는 ‘기업 경쟁력 강화’, ‘투자 유치’ 등의 구호를 앞세워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유지했다. 노동자의 비정규직화, 손배소ㆍ가압류, 직권중재가 진행됐다. 민주노총 이정미 여성국장은 “손배소ㆍ가압류 조항이 들어있는 노동관계법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노동탄압에 악용되고 있을 뿐”이라며 비판했다.

 

 
비정규직화, 손배소ㆍ가압류,직권중재, 특수고용직 차별…

“전태일 열사의 사상은 아직도 유효하다”

 

한상진 교수(사회학과)는 “정부의 정책에 생존을 좌우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이러한 상황은 불안과 분노를 증가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열사정국’으로 불리는 2003년, 두산중공업의 배달호씨와 한진중공업의 김주익씨는 손배소ㆍ가압류의 부당함에 항의하며, 근로복지공단의 이용석씨와 현대중공업의 박일수씨는 비정규직의 철폐를 주장하며 자결해 파문을 던졌다.

 

 

직권중재 조항은 올해 LG정유와 지하철이 ‘불법’파업을 강행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직권중재는 필수공익사업장에서 노사분쟁이 일어나면 정부의 직권중재에 회부하고,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정부의 중재안을 받아들이는 제도이다. 민주노총 이시정 교육국장은 “대부분이 공기업인 필수공익사업장의 특성상 직권중재안은 사측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며 그 부당성을 주장했다. 

 

 

작년 화물연대 파업이나 최근 학습지교사들의 투쟁은 특수고용직 문제와 연결돼 있다.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은 사업주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돼 있지만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재능교사노조 유득구 위원장은 “학습지 교사들은 탈퇴회원이나 가짜 신규회원의 회비 납부를 강요받기도 하지만 보호 장치는 없다”며 특수고용직의 지위 향상을 주장했다.

 

 

지난 16일(목)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10여명이 파견법 철폐와 비정규직차별금지법의 통과를 요구하며 열린우리당 의장실을 점거했다. 대구지하철 환경미화원들은 64만원의 최저임금 적용을 요구하며 파업중이다.

 

 

전태일기념사업회 황만호 사무국장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태는 여전하다”라며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던 전태일의 사상은 아직 유효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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