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창구 명예교수(약학과)

얼마 전 1989년에 미국에서 나에게 세례를 주신 93세의 P 목사님을 26년 만에 서울에서 만났다. 감격의 해후를 한 후 내 근황을 보고 드렸더니 “여기저기 강의를 다니신다니 얼마나 좋습니까?”라고 하셨다. 나는 ‘정년퇴임 후에도 할 일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라는 말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정직하게 살라고 강의하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는 뜻이었다. 평소 정직을 강조하시던 목사님다운 말씀이셨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의 과거는 부패와 부정으로 얼룩져 있다. 예컨대 8~90년대만 하더라도 운전자가 지갑에 면허증과 함께 오천 원짜리 한 장을 끼워 넣고 다니는 것이 관행이었다. 법규 위반으로 교통경찰이 면허증 제시를 요구할 때 지갑을 건네주면 그 돈을 꺼내 갖고 위반 사실을 눈감아 주곤 했기 때문이다. 교통경찰을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한 채 산다는 소문마저 있었다.

그런데 이제 교통경찰에게 돈을 주는 일은 거의 완벽하게 없어진 것 같다. 고질적인 부패가 기적처럼 사라진 것이다. 돌아보면 깨끗해진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과거 동사무소나 구청의 민원 창구에 만연했던 급행료도 없어졌다. 또 119대원은 절대로 출동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 이처럼 서민층의 부패는 과거보다 한결 깨끗해졌다. 문제는 고위층의 부패다. 그들의 부패는 점점 규모가 커지고 은밀해지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윗물이 아랫물보다 먼저 맑아지기는 틀린 모양이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정직이란 무엇일까? 나는 정직함에는 최소한 두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단계는 부정부패, 도둑질 등 법에 따라 단속될 만한 범법을 하지 않는 단계를 말한다. 서울대에서도 과거에는 시험 때 부정행위를 하는 학생이 있었다. 교수님에게 애원해 좋은 학점을 받아 내는 학생도 있었다. 당시 이런 행동은 일종의 애교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참외 서리도 낭만이라고 포장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행위는 지금은 명백한 범죄행위가 됐다. 과거에 비해 우리나라의 도덕 또는 정직에 대한 기준이 높아진 탓이다.

정직함의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의 능력을 솔직하게 돌아보는 것이다. 예컨대 서울대 학생들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또는 자신이 잘나서 서울대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 어쩌면 부모로부터 받은 두뇌와 건강, 그리고 집안의 경제능력 등 여러 면에서의 도움이 더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도움’을 인정하는 것이 정직함이다. 기독교에서는 이 도움을 은혜라고 부른다.

정직한 사람은 받은 은혜를 인정하고 범사에 감사한다. 스스로 잘난 척하지 않고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된다. 자신의 능력이 크지 않음을 깨닫고 성실하게 노력한다. 자신보다 덜 받아 상대적으로 약자가 된 사람을 따듯하게 이해하고, 사랑하고 돕는다. 마침내 세상은 살 만한 곳으로 바뀐다.

서울대 학생들은 학비, 교수진, 시설 등 여러 면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좋은 조건에서 공부한다. 졸업 후에도 서울대 출신이라는 브랜드 덕을 톡톡히 보며 산다. 서울대가 세상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서울대 학생들은 자부심을 느끼기에 앞서, 빚진 자의 심정으로 세상에 정직하고 겸손해야 한다. 행동(1단계)도 마음가짐(2단계)도 그래야 한다. 이는 서울대 학생이 지켜야 할 최소한도의 도리인 것이다.

모두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이런 때에는 누군가 나서서 활로를 열어줘야 한다. 누구여야 할 것인가?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눈을 들어 관악을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려운 이때야말로 서울대가 나서야 할 때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함께 더불어 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결코 남을 딛고 일어서는 개인적인 출세가 서울대 출신의 삶의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

오늘 서울대가 미래를 위해 감당해야 할 사명은 매우 엄중하다. 정직하라는 P 목사님의 말씀이 새삼 귀를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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