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매체의 종말이 점쳐지기도 하는 요즘, 동네마다 자리 잡은 작은 책방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다. 동네책방, 독립서점으로 불리는 이들은 대형서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별난 주제의 책이나 물량이 적어 쉽게 구할 수 없는 독립출판물을 구비해 손님을 끈다. 이번 연재 기획은 저마다의 개성과 철학을 간직한 서점들을 찾아가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① 일단멈춤 ② 스토리지북앤필름 ③ 햇빛서점 ④ 상상하는삐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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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이대역에서 3분 거리라는 말을 듣고 5번 출구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길을 걷다보니 수십 년은 족히 이곳을 지켜왔을 듯한 오래된 가게와 낡은 주택이 보이고 나이 지긋한 주민들과 마주쳤다. 그러다 왼쪽 골목길로 눈길을 돌린 순간 노란 입간판과 하늘색 미닫이문의 가게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마포구 염리동의 골목길 모퉁이에 자리한 여행책방 ‘일단멈춤’을 그렇게 만났다.

 

대형서점에 없는 진짜 여행책을 팔다

 

과거 재개발구역이었던 이곳에 어떻게 여행책방이라는 이채로운 공간이 들어섰을까. 일단멈춤 송은정 대표(31)는 직장을 다니다가 2014년 11월 이 서점을 시작했다. 취업과 사직, 재취업을 반복하던 송 대표는 회사를 완전히 그만두고 책방을 열기로 했다. 회사를 떠나 독립적인 활동을 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북아일랜드 캠프힐에서 1년을 보낸 경험이다. 밤을 새고 마감에 쫓기며 사는 삶에 회의가 들었다. 책방을 택한 것은 오래 전부터 책을 좋아했고 출판사와 잡지사의 에디터로 일하며 줄곧 책과 관련된 일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몇 독립출판물 전문서점이 이미 각광을 받고 있던 때라 책방을 차별화할 다른 색깔이 필요했다. 그는 여행책방을 연 이유에 대해 “내가 좋아하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친근한 테마라 여행을 책방의 컨셉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국내에 아직 여행을 다루는 책방이 없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여행을 주제로 한 독립출판물과 단행본을 판매하는 일단멈춤은 일반적인 서점과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대형서점에서 잘 눈에 띄지 않았던 파리, 치앙마이, 쿠바 등 세계의 여행지에 대한 책들이 7.5평이 남짓한 한적한 공간에 저마다 표지를 드러내며 진열돼있다. 기존의 단행본과 다르게 실 제본, 희귀판형 등으로 제작된 개성 있는 독립출판물도 시선을 잡아끌고, 송 대표가 여러 여행지에서 가져온 책, 기념품, 티켓 등 서점 곳곳의 소품 또한 이국의 정취를 전한다.

▲ 7.5평 남짓한 책방 내부에는 송은정 대표가 직접 골라놓은 다양한 여행책이 진열돼 있다.

무엇보다 진열된 책의 종류도 종합서점의 여행도서 서가와 다르다. 여행서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이드북이나 유명 작가가 쓴 베스트셀러 서적이 이곳엔 없다. 대신 신간·구간을 가리지 않고 책방 주인은 나름의 안목과 기준으로 “그 자체로 여행에 관한 훌륭한 텍스트”를 선별해 입고한다. 다시 말해 가이드북처럼 실제 여행을 준비하거나 떠나는 과정에서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언제 읽어도 독자에게 의미 있는 책이다. 예컨대 송 대표가 “파리라는 유일무이한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며 소개한 인문학자 정수복의 프랑스 연작이 그렇다.

 

여행책방이 선사하는 특별한 체험

 

90년대에 봤을 법한 목욕탕, 구멍가게, 이발소 등 허름한 가게들 사이에 위치한 일단멈춤을 찾는 손님들은 의외로 대부분 20, 30대 여성이다. 송 대표는 “SNS를 굉장히 열심히 하고 숨겨진 예쁜 공간이나 소규모 책방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젊은 여자분들이 절대 다수”라고 말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지 1년을 갓 넘긴 지금, 주민들도 조금씩 가게에 찾아오고 있다. 한 중국집 배달부가 근처에 배달을 하러 왔다가 우연히 서점에 들어와 추천받은 책을 사간 적도 있다.

서점을 방문한 이들은 일단멈춤을 ‘문득 들르고 싶고 여행을 떠나고 싶은 곳’이라고 SNS에서 이야기한다. 일단멈춤은 여행에 관한 출판물을 유통할 뿐만 아니라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이 머무르다 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분주한 일상을 일단 멈춘 채 여행책을 읽고 대리만족을 느끼거나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손님들은 독서의 리듬에 잘 맞는 편안한 음악을 배경으로 세계 각국에 대한 책을 둘러보다 종종 주인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곤 한다.

책방 SNS를 팔로우하는 사람이라면 수시로 열리는 여행토크나 워크숍을 신청해볼 수도 있다. 여행토크에서는 해당 여행지를 잘 알거나 여행과 관련된 책을 낸 사람을 초대해 친밀하고 가벼운 분위기에서 소규모로 이야기를 나눈다. 태국 치앙마이에 대한 여행토크에서는 6명 내외의 수강생들과 쌀국수를 만들어 나눠먹기도 했다. 워크숍은 외국어부터 드로잉까지 다양한 주제로 열리고 특히 여행책 만들기나 인디자인, 일러스트레이터 기초 워크숍처럼 자신의 창작물을 내기 위한 수업들이 많다. 행사를 이끄는 강사들은 대개 우연히 손님으로 서점에 찾아와 주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섭외된 이들이다.

작은 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콘텐츠도 있다. 책방 근처의 까페 ‘언뜻가게’의 사장이자 인디뮤지션인 ‘피터아저씨’가 공연을 하고, 책방에서 열린 드로잉 워크숍의 결과물을 수강생들이 전시한다. 일단멈춤이 이웃 가게들과 함께 염리동·아현동의 골목길과 장소들을 기록한 ‘소금언덕 마을지도’를 만나볼 수도 있다. 책방을 통해 이뤄진 만남과 작업들이 꾸준히 지속되기 때문에 송 대표는 일단멈춤을 “어깨동무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오늘도 별일 없이 열려있기를

 

단정하게 꾸며진 외관, 책과 소품이 멋스럽게 진열된 내부, 이곳에서 열리는 다양한 문화 행사는 방문자들에게 서점에 대한 낭만적인 이미지를 남기기도 한다. 실제로 최근 소규모 책방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늘면서 매체에서도 앞다퉈 소규모 책방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때 소규모 서점은 ‘우리 동네 사랑방’이나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는 장소’로, 서점 주인은 원래 하던 일을 과감히 그만두고 꿈을 이룬 사람들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송 대표는 동네책방에 대한 이러한 시선이 책방도 엄연히 경제활동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게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부업을 하고 있다는 그는 “책방 운영으로는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진지하게 소규모 서점을 열고 싶은 사람들에게 송 대표는 “제일 필요한 건 6개월 동안의 생활비”라며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소규모 책방의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만큼 미래에 대한 거창한 계획도 없다. 송 대표는 “올해도 항상 그랬듯이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얘기하며 사건이 벌어지고 무언가 재밌는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라고 덤덤히 말했다. 일단멈춤은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영문명 ‘Stop for now'에는 또 다른 의미도 담겨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집중하자는 것. 이 책방은 좋은 책을 소개한다는 책방의 기본을 지키고 이곳에서 생겨난 우연한 만남과 기회에 충실히 응해왔다. 현재의 삶을 위해 잠시 멈추고 책과 사람을 마주해온 이 공간은 오늘도 별일 없이 그러할 것이다.

 

 

사진: 정유진 기자 tukatuka13@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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