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끼 사 먹으면 사라지는 최저시급 6,030원. 그마저도 사장님의 갑질로 떼인다. 아무리 ‘노오력’해도 흙수저는 열정페이나 강요당할 뿐 유리천장을 깰 수 없다. 삼포, 오포, 칠포를 넘어 n포 세대가 살아가는 이곳은 ‘헬조선’이다. 그런데 여기 헬조선을 한판의 게임으로 만들고 절망의 구렁텅이를 희화화하는 공연이 있다. ‘병(丙) 소사이어티’의 연극 ‘노동집약적 유희 2016: 레크리에이션’(노동집약적 유희)이 그 주인공이다.

병 소사이어티는 실험성 짙은 창작극을 올리는 극단이다. 2012년 송이원 씨(미학과·08)와 류효은 씨(건축학과 석사과정·14졸)를 주축으로 결성된 이후 무대구성도 극 진행도 독특한 다섯 편의 창작극을 올렸다. 극 ‘저한테 왜 그러세요’에서 배우들은 ‘뽁뽁이’ 위에서 요가 자세를 취한 채 콩트를 진행했고 ‘꼬마 짱꼴라’에서는 배우가 교실 책상을 이리저리 재배치하며 책상을오르내린다. 이 같은 실험성은 극단의 이름에도 닿아있다. 송이원 씨는 “병 소사이어티의 병은 갑의 밑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며 “다양한 시도를 해보며 갑도 을도 아닌 병의 존재 방식이 무엇일지 찾아 나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병 소사이어티의 새로운 실험극 노동집약적 유희가 지난 20일(토)과 21일 서울연극센터에서 열렸다. 헬조선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실험하는 이번 연극엔 무대 벽도 대본도 없다. 대신 유명 보드게임 ‘부루마블’을 패러디한 이른바 ‘불우마블’이 무대에서 진행된다. 간단한 게임규칙과 응원구호를 익힌 관객들 앞으로 사전에 제작된 대형 말판이 펼쳐졌다. 미리 SNS를 통해 모집된 일반인들이 주사위를 던지는 선수이자 말판 위를 쿵쿵대며 뛰어다니는 인간 말이 됐다. 선수들은 노동칸에서 돈을 벌고 소비칸에서 돈을 쓰는데, 파산하지 않고 한 시간을 버티는 선수가 최종 우승자로 등극한다.

선수들의 생존 게임인 불우마블은 헬조선의 축소판과 다름없다. 한 시간을 일해 받을 수 있는 최저시급은 6,030원, 말판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차감되는 월세는 35만원.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선택권은 거의 없다. 자신이 도달한 칸에 따라 원하지도 않는 노동과 소비를 해야만 한다. 파산을 피하려고 저가상품을 사려 애쓰고 기회가 될 때마다 체력지수(HP)를 돈으로 바꾸지만 ‘학자금 대출이자상환’ 카드가 등장하는 순간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관객 김정하 씨(영어영문학과·11)는 “일상을 게임으로 목격하니 재밌으면서도 씁쓸했다”고 말했다.

게임의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니, 연애는 돈 드는 일일 뿐이고 우울증은 오히려 반길 일이다. ‘연애’ 카드를 뽑은 선수가 아웃백에서 2인분, CGV에서 영화표 두 장을 사고 나니 통장은 반 토막 났고 객석에서는 웃음 섞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반면 ‘우울증’ 칸에 도착한 선수는 말판 도는 것을 멈추고 당장 소비를 하지 않아도 돼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 "오늘 판 역시 우승자가 없네요." 오른쪽 스크린에 표시된 선수들의 최종 보유금액은 모두 마이너스다.

경기가 진행되면서 관객들은 애초에 선수들이 파산하도록 설계된 불우마블의 부조리한 구조를 깨닫게 된다. 선수가 말판 한 바퀴를 돌며 열심히 번 돈은 월세에 비해 턱없이 적다. 도박할 수 있는 ‘생동성 시험’ 칸에서 일확천금을 얻지 못하는 이상, 생존하기 위한 수익을 지속적으로 낼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선수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경쟁하지만, 경쟁자가 탈락할수록 말판을 도는 속도가 빨라진다. 최후의 1인은 기뻐할 틈도 없이 말판을 돌다 1분을 남기고 파산하고 말았다.

모순적이게도 선수들이 괴로워하는 모든 과정은 객석의 웃음을 자아내는 유희로 표현된다. ‘콜센터’ 노동칸에 걸린 선수가 씩씩거리며 전화기를 내팽개치는 시늉을 하거나 ‘맥도날드’ 노동칸에서 배달부로 일하는 선수가 오토바이 자세를 엉거주춤 잡자 객석에서는 피식피식 실소가 새어 나온다. 상황을 비꼬는 중계진의 멘트도 웃음을 증폭시킨다. ‘대한통운’ 택배 상·하차 노동에 또다시 걸린 선수에게 “할 만했나 봐요, 일을 대충 해서 (대한통운에서) 다시 받아줄지가 의문이었는데 말이죠”라고 하는 식이다. 연출을 맡은 송이원 씨는 “무력하게 절망에 빠져있는 대신 웃음으로써 절망의 상황에 거리를 두고 절망을 헤쳐 나갈 긍정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유희의 형식을 취한 의도를 밝혔다.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게임 형식으로 재현한 헬조선을 본 관객들도 말판 위에서 선수들이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일지 질문을 던져봤을지도 모른다. 선수들이 경쟁하는 대신 손을 잡았다면 어땠을까? 부조리한 규칙에 항의했다면 어땠을까? 이 질문은 불우마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헬조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바뀔 수 있을지 모른다. 이것이 곧 병 소사이어티가 벌인 이번 실험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사진: 장유진 기자 jinyoojang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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