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금)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가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기호학, 철학, 역사학, 미학 등에 걸친 드넓은 학문 세계를 구축하고, 그 방대한 지식을 담아낸 소설로 대중에게까지 이름을 날린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세상의 모든 지식’. 그간 한국에서는 주로 베스트셀러 소설가 에코만 부각돼 왔지만 사실 그는 소설가기 이전에 기호학자였다. 에코가 ‘이론으로는 불가능한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소설로 돌파한다’고 말했던 것을 보면 그의 소설 역시 그의 이론과 떼어놓고 보기 어렵다. 기호학 이론서에서부터 추리소설에 이르기까지 에코의 저작은 다양하고 무수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중심은 분명히 존재한다. ‘해석’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다른 무언가를 대신하는 모든 것, 기호

 

1932년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에코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변호사가 되기 위해 토리노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세 철학과 문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성격을 띠는 초기 저작 이후 그는 『열린 작품』(1962)에서 예술 작품의 ‘해석’을 고민했다. 이 저서에서 그는 현대 예술 작품이 ‘열린’ 구조를 취하기 때문에 수신자의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고 이를 통해 작품이 비로소 고유의 의미로 실현된다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박상진 교수(부산외대 이탈리아어과)는 “당시의 예술 비평은 작가의 의도를 규명하는 데 집중돼 있었다”며 “에코가 해석에 대한 수신자의 주도권을 주장한 것은 매우 새로운 관점이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그 주장이 직관적인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다. 에코는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작품의 열린 구조’를 뒷받침할 학문적 근거를 찾던 도중, 기호학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기호학은 기호에 어떤 의미가 부여되고 해석되는 과정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기호는 두 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는 표현(기표)과 그러한 표현이 지칭하는 내용(기의)이다. 기호의 두 가지 기능에는 특정한 표현에 특정한 내용이 부여되는 ‘의미화(signification)’, 특정한 표현을 보고 특정한 내용을 해석해내는 ‘소통화(communication)’가 있는데 둘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기호학 이론의 갈래가 나눠진다. 대표적인 언어학자이자 기호학자인 소쉬르와 옐름슬레우, 그레마스 등은 의미화에 주목한 ‘생성 기호학’을 연구했다. 이들과 달리 에코는 퍼스를 이어 수신자가 기호에서 의미를 해석해내는 소통화에 집중한 ‘해석 기호학’을 연구했다. 에코가 예술 작품의 해석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던 중 기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생각하면 소통화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본격적으로 기호학 연구에 뛰어든 에코는 일반 기호학의 이론적 토대를 설정하고자 『일반 기호학 논고』(1975)를 집필했다. 김운찬 교수(대구가톨릭대 기초교양교육원)는 “『일반 기호학 논고』에서 제시한 다양한 개념과 이론적 토대는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연구 대상”이라며 “기호학 발전에 큰 계기를 부여한 책”이라고 설명했다. 에코는 이 책에서 기호가 ‘다른 무언가를 대신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무엇이든지 기호가 될 수 있다. 흔히 생각하는 표지판, 책 속의 문자는 물론이고 음악, 무용, 특정 상황, 실체가 없는 문화 현상까지도 기호다. 기호에 대한 포괄적인 정의를 바탕으로 에코는 작품도 기호의 일종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수신자가 그 작품을, 즉 기호를 어떤 과정을 거쳐 해석하는지 소통화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기호는 열려있다

 

소통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에코는 이전까지의 학자들과는 다소 다른 입장을 취했다. 에코 이전의 학자들은 기호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임의의 대상을 가리킨다고 봤다. 하지만 에코는 기호의 의미가 존재론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다른 문화 요소들과 상호 작용하며 형성된다는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기호를 ‘문화적 단위’로 규정한 것이다. 문화적 단위로서의 기호는 그와 연관된 다른 기호들을 살핌으로써만 해석할 수 있다. 한 기호를 설명하는 다른 기호,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또 다른 기호, 그리고 또 다른 기호… 끊임없는 기호의 목록들을 통해서 기호는 비로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에코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에코의 관점에서 ‘시적인 것’의 정의는 한 줄의 설명이 아니라 ‘호메로스적인 것’ ‘셰익스피어적인 것’처럼 그와 유사한 다른 기호들의 목록이다. 2010년 루브르 박물관 측의 요청으로 전시를 기획했을 때 에코는 주저 없이 ‘목록’을 주제로 선정하기도 했다.

에코는 기호에서 기호로 나아가는 해석에는 반드시 ‘추론’의 과정이 동반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호가 언제나 등가의 관계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기호의 해석은 ‘p=q’라는 동일성에 의한 등식이 아니라, ‘만약 p라면, 그렇다면 q이다’라는 추론에 기초한다. 예를 들어 ‘음식점 앞에 줄이 길다’라는 명제는 ‘음식점의 음식이 맛있다’라는 명제를 추론하게 한다. 그렇다고 두 명제가 서로 등식 관계는 아니다. 이러한 추론 방식을 ‘가추법’이라 하는데, 이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연역법, 귀납법과 다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식이다. 인물의 겉모습만 보고 출신이 어딘지, 어떤 성격인지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셜록 홈즈는 가추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사례다.

결국 하나의 기호는 연쇄적인 추론의 과정을 거쳐 끊임없는 목록이 되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세계를 구축한다. 기호 하나가 인간의 방대한 문화적, 역사적 경험을 포괄하는 일종의 ‘백과사전’인 것이다. 이는 기호가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어떤 맥락에 있는 기호인지, 기호를 해석하는 수신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기호는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말하자면 기호는 ‘열린’ 상태다.

 

게으른 작품을 깨우는 독자

 

그렇다면 이제 ‘열려 있는 기호는 어떻게 해석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남는다. 이는 ‘열려 있는 기호는 어떻게 그 내용을 실현하는가’라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에코는 ‘작품(기호)의 의도’를 독자가 해석함으로써 독자가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답한다. 『이야기 속의 독자』(1979)에서 에코는 작품을 중심으로 ‘작가의 의도’ ‘작품의 의도’ ‘독자의 의도’를 구분했는데, 이들은 일치하지 않을뿐더러 또 때로는 서로 배반하기도 한다. 이때 작품의 의도는 작가 개인의 의도와는 완벽히 구분된다는 것이 에코의 견해다.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작품은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고 본 것이다. 에코가 독자는 ‘작가의 의도’가 아닌 ‘작품의 의도’를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작품은 게으르다’고 에코는 말한다. 작품이 지닌 열림의 상태는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독자가 그 의미를 해석해내지 않는다면 작품은 결코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실현할 수 없다. 죽은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작품이 그 고유의 내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독자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다만 에코가 무제한적 해석을 인정하는 상대주의를 취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작품의 ‘열림’을 주장하는 동시에 그 한계를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이에 대해 박상진 교수는 “작품 안에서 계속 새롭게 생성되는 의미들을 독자가 발굴해내는 것”이 에코가 주장한 열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론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소설로 해야 한다

 

20여년에 걸쳐 열린 작품의 해석을 연구해오던 기호학자 에코는 50세의 나이에 돌연 소설을 출판하며 열린 작품을 창작하는 소설가로 변신한다. ‘이론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소설로 하고자’ 쓴 이 소설은 에코가 기호학이라는 학문에서 마주한 막다른 길에 대한 돌파구였다. 중세 수도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필사본을 중심으로 일어난 살인사건을 그린 추리 소설 『장미의 이름』(1980)은 방대한 역사적, 철학적 내용을 정교하게 담아 명저라고 평가되는 동시에 2,000만 부의 판매고를 올려 대중적 성공까지 거뒀다.

수많은 인용으로 가득한 『장미의 이름』은 독자와의 유희를 벌이려는 작가의 태도가 아주 잘 나타나 있는, 에코 스스로 말해오던 ‘열린 작품’이라 평가된다. 박상진 교수는 “에코가 풍부한 인용으로 텍스트를 구성해놓았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발견, 창출해낸다”고 에코와 독자의 지적 유희를 설명했다. 『장미의 이름』을 읽은 독자는 소설의 구절을 보고 다른 텍스트, 역사적 인물, 사건 등을 연상하게 된다. 웃음에 대한 논쟁은 에른스트 로베르 쿠르티우스의 『유럽 문학과 라틴 중세』로 이어지고, 멜크의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마지막 장면은 요한 하위징어의 『중세의 가을』을 연상시킨다. 에코 스스로가 주장했던,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 또 다른 기호로 이어지는 해석의 물결이 완벽히 재현된다. 다시 말해 『장미의 이름』은 수많은 해석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하나의 ‘백과사전’과도 같은 의미의 세계를 지닌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에 의미가 너무나 많아 그 어떤 의미도 남기지 않는 것과도 같기에 첫 소설 제목에 ‘장미’라는 단어를 넣었다고 말했다. 그가 창조한 작품세계를 탐험하며 독자들은 그가 담아 놓은 의미를 찾기도, 또 그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찾기도 하며 『장미의 이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에코는 스스로 창조한 열린 작품을 사이에 두고 독자와 해석 놀이를 펼치다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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