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취재] 과거 '스쾃' 운동의 중심지를 찾아가다

거대 자본으로부터 공간을 지켜내기 위한 예술가들의 움직임이 거세다. 한남동의 카페 겸 미술관 ‘테이크아웃드로잉’은 지역 예술가들의 본거지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공간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는 처음 계약과는 달리, 새 건물주가 된 가수 싸이가 강제퇴거를 명령해 예술가들이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지난 2월 다양한 예술가들이 프로젝트 ‘모두를 위한 레지던시’를 진행하며 성공적으로 시민들과 연대했다.

테이크아웃드로잉, 문래예술촌, 홍대 두리반 등 최근 저항의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는 ‘불법점거운동’은 장소 속에서 예술을 통해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유럽의 ‘스쾃’(squat) 운동과 닮아있다. 20세기 후반 일어난 스쾃은 소외되고 방치된 장소를 예술가의 집단 창작촌으로 만들어 활력 넘치게 탈바꿈시키는 문화적 도전이었다.

특히 동베를린에 위치한 ‘타헬레스’와 ‘베타니엔’은 빈 건물이 재개발 위기에 처하자, 예술인들이 점거해 그들의 작업실로 공식 자리매김하게 된 성공적인 사례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예술은 자본의 물결에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지금 그곳들의 모습에서 테이크아웃드로잉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을까.

 

타헬레스,

또다시 외로이 남겨진 폐허에서

‘쓰레기’ ‘유령’ ‘흉물’. 타헬레스(제목 사진)를 소개할 때면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유난히도 깔끔한 오라니엔부르거 거리에서 도심 속 폐허를 마주하자니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거대한 건물에는 아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벽면 가득히 그래피티가 채워져 있었다. 낙서는 건물 하나로도 모자라 주변 주차장과 인근 건물의 벽면까지 번져 있었다. 마치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의 아우성을 지금의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타헬레스에는 아무도 없다. 거대한 철문만이 폐쇄를 알릴 뿐이다.

건물이 폐허가 되고, 폐허에 예술가들이 찾아들고, 그들이 떠나 공간이 다시 빈자리로 남기까지 100년 동안 타헬레스는 굴곡진 역사를 거쳤다. 1910년대까지 대형쇼핑몰로 사용됐던 이 공간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오래도록 방치됐다.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정부는 연이어 건물을 허물 것을 발표했다. 타헬레스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타헬레스가 부서지기 두 달 전, 각 나라의 예술가들이 이곳을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은 소방차를 이용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타헬레스를 불법점거했다. 역사적인 장소를 철거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갈 곳이 없는 예술가들이 둥지를 틀 곳이 필요하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약 10년 정도의 싸움이 계속된 끝에 타헬레스는 정부로부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곳으로 인정받았고, 공식적인 예술단지가 돼 보조금까지 지원받게 된다.

그 후 타헬레스는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의 랜드마크로 발돋움하게 된다. 폐허 속에서 예술의 꽃이 피어난 것이다. 러시아, 칠레 등 세계에서 모인 50여 명의 작가들이 음악, 조각, 설치, 의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험정신을 발휘했다. 건물 안 공터에는 여기저기 특이한 조형물들이 심어져 있고, 벽면에는 그래피티와 더불어 원색을 사용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1층에는 카페 겸 영화관과 공연장이 있었고, 2층에는 갤러리와 살롱이, 그 위로는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자리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진정한 의미의 복합예술공간이었다.

반자본으로 시작됐던 공간은 아쉽게도 다시 자본의 벽에 부딪혀 텅 빈 건물로 남게 됐다. 본래 정부의 소유였던 타헬레스 건물은 부동산업자에게 매각된 뒤에도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예술가들에게 저렴한 금액의 임대료만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2009년 당시 건물을 소유하던 그룹에서 10년의 임대계약이 끝났다며 예술가들에게 강제퇴거를 통보했다. 예술가들의 두 번째 예술점거는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2012년에 타헬레스는 문을 닫는다.

그때의 열렬했던 과거는 어디로 갔을까. 10여 년간 예술가들이 보여준 실험의 흔적은 철문과 철창 너머에 자리할 뿐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타헬레스를 잊어버린 듯, 거리를 지나가다 그곳을 눈엣가시처럼 흘겨보고 지나갔다. 철창 사이로 타헬레스를 찍은 헬레나 씨는 “베를린 중심가에 이렇게 산만한 건물이 있어 신기하다”며 “역사를 지닌 공간인지는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근처 식당에서 일하는 벤 씨는 “몇 년 전 이 거리가 시위하는 예술가들로 꽉 찼던 시끄러운 시절이 있었다”며 “지금은 사람들이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베타니엔

때는 프랑스 68혁명의 기운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던 1968년, 젊은 좌파 예술가 100명이 오래된 성 베타니엔을 지키기 위해 스쾃 운동에 나섰다. 1847년 처음 지어져 병원으로 사용돼오던 이 건물은 전후 혼란한 시기에 문을 닫았다. 예술가들은 성을 지키기 위해 시위를 벌였고, 경찰과의 마찰로 희생자까지 나왔다. 결국 1975년 베를린시는 베타니엔을 예술가들의 작업공간으로 인정했다. 그 후 베타니엔은 약 1,000명의 예술가를 배출하면서 세계적인 레지던시로 이름을 떨쳤지만, 최근 두 곳으로 갈라지게 된다. 2010년 6월 베타니엔의 이름을 딴 '쿤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베타니엔)이 본거지에서 15분 거리에 새 보금자리를 차렸다. 레지던시와 프로그램을 탁월하게 운영할 길을 찾아보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기존 공간은 '쿤스트크바르티어 베타니엔'으로 이름을 바꿨다.

 

▲ 베타니엔 입구에 위치한 박기진 작가의 'path'

쿤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베를린 '홍대'엔 외딴 성이 있다 

지난 1월 22일부터 2월 14일, 베타니엔에서 지난 1년간 거주했던 일곱 작가들의 그간의 활동을 마무리하는 전시가 열렸다.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국 출신 박기진 작가의 작품 ‘path’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교하게 조립된 목재 재료와 압도적인 크기, 그리고 두 형체 간의 묘한 기류가 눈에 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흰 구겨진 비닐봉지의 기계들이 꾸물럭거리고 있다. 김대홍 작가의 ‘zoo / lab’는 다소 애처로워 보이는 이 기계생명체의 존재이유를 자조적으로 묻는 작품이다. 설치미술, 키네틱 아트, 사진, 회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균형 있게 접할 수 있는 전시였다.

‘국제 레지던시’를 표방하는 베타니엔에는 출신지도 전문 분야도 다양한 작가들이 모여있다. 노르웨이, 핀란드 같은 유럽 국가뿐 아니라 예멘, 이스라엘 등 중동 국가와 아시아 국가 출신의 작가들도 비중이 크다. 김대홍 작가는 “크로이츠베르크 구역이 베를린에서도 국제지역인데, 여기는 더 이방인들이 모인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외딴 성’ 비유는 베타니엔 특유의 고고함 때문에 붙여졌기도 하다. 당장 인근에 크고 작은 수십 개의 갤러리가 있지만 ‘네임밸류’로 대기업 후원자를 여럿 거느리는 곳은 베타니엔 뿐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젊은 문화를 만끽하는 동네인 크로이츠베르크는 일명 한국의 홍대 같은 곳이다. 길거리엔 그래피티가 즐비하고 밤마다 정통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흐르는 홍대에, 청담동에나 있을 법한 고급 갤러리가 위치한 것이다.

베타니엔은 세계에서 가장 작가들에게 후원을 잘 해주는 레지던시로 알려져 있다. 작가 한 명이 1년간 체류하면서 드는 약 8,000만원의 돈을 관공서, 지자체, 은행, 대기업 후원자가 선뜻 부담한다. 심지어 베타니엔의 후원자가 되기 위한 대기줄까지 있을 정도다. 예술가로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으니 경쟁률도 높다. 베타니엔에는 10년 이상 활동한 중견 작가가 대부분이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작가들도 제법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부산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각각 김대홍 작가와 박기진 작가를 후원하고 있다.

반자본으로 시작했던 베타니엔이 자본주의의 정점인 하이아트를 표방함으로써 살아남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현재 베타니엔은 네임밸류와 A급 작가들의 명성에 힘입어 메이저 갤러리로서 위상을 떨치곤 있지만, 그만큼 과거의 실험정신이나 공동운명체 의식과는 멀어졌다는 비판도 있다. 박기진 작가는 “직원들은 굉장히 프로페셔널하게 이곳을 운영하고 있고, 직원 수도 12명으로 비교적 많은 편이다”라며 “하지만 전세계 큐레이터들로부터 먼저 연락을 받는 입장이다보니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 뮤직비디오를 틀어놓은 'CTM 2016'의 현장

쿤스트바르티어 베타니엔,

온 동네 힙스터는 다 모였네

‘그렇다면 자본의 물결 속에 스쾃의 정신은 사라진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갖고 쿤스트크바르티어 베타니엔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홀로 조명을 내뿜고 있는 고성이 보였다. 사방이 어두웠지만 그 주변만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성문에 들어서니 온 동네 힙스터들을 이곳에 다 모아놓은 듯한 젊은 열기가 느껴졌다. 미국에서 온 제이든 씨는 “베를린에서 역사적인 현장을 간다고 해서 왔는데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많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거대한 성 전체가 갤러리, 공연장, 예술학교, 스튜디오 등 현대예술을 위해 바쳐진 공간이었다. 그 중 1층 동쪽에 위치한 현대미술 갤러리 ‘쿤스트라움 크로이츠베르크/베타니엔’에서는 국제적인 일렉트로니카 음악 축제 ‘CTM 2016’이 한창이었다. 전자음악에 화려한 영상과 몽환적인 조명을 가미한 작품들 덕분에 마치 갤러리 전체가 클럽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관객 마티아스 씨는 “감성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네오사인의 색감이 나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 같다”고 느낌을 말했다. 관객 세르지오 씨는 “베타니엔은 형식적으로 최첨단 문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각자 다른 나라에서 온 예술가들은 비단 형식에서만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했던 것은 아니다. 작가들은 전쟁, 인종차별, 성차별, 자본주의 등 기성 가치관에 반항하는 메시지를 작품에 담아 선보이기도 했다. 이스라엘 출신의 메이라 어셔는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노이즈/사운드 아트를 선보였다. 작가 펜더 슈레이드는 여성 트랜스젠더이자 사운드 엔지니어인 자신이 어떻게 자신의 몸과 음악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 털어놓는 시간을 가졌다.

실험적인 예술형식에 반항정신까지, 쿤스트라움 크로이츠베르크/베타니엔은 예전 스쾃의 정신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공간은 과거의 의미보다도 현재적 의미가 더 큰 공간이었다. 직원 막달레나 씨는 “과거의 유적으로 생각하고 찾아오는 관객은 없다”며 “현재의 문화와 전시를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이곳에 온다”고 답했다.

자본에 저항하며 시작했던 베를린의 세 공간은, 수십 년이 지나 예술이 자본에 물들어가는 지금까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공간은 자본과 싸우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도, 방향을 선회해서 살아남을 수도, 어쩌면 그 때의 정신을 살리면서도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테이크아웃드로잉의 다음 선택지가 무엇이 될지는 공간을 점거한 그들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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