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각종 포털사이트에 낯선 단어 하나가 실시간 검색어로 떠올랐다. 필리버스터가 그것이다. 필리버스터는 다수당의 일방적 법안 처리를 막기 위해 장시간 발언으로 국회 의사진행을 지연시키는 무제한 토론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선 1969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마지막으로 진행한 이후 기억 속에서 잊혔다. 1973년 국회의원의 발언시간을 최대 45분으로 제한하면서 사실상 폐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2년 국회선진화법 도입 이후 필리버스터는 부활했고, 야당이 지난달 23일 테러방지법의 본회의 의결을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요청하면서 47년 만에 다시 등장했다.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진행하는 목적을 두고 치열한 공방이 펼쳐졌지만, 필리버스터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 지난달 23일 시민들이 필리버스터 방청을 위해 국회의사당 후문 보안 게이트를 통과하고 있다.

◇평일 낮에도 방청 위해 몰린 시민들=지난달 29일 국회엔 이른 시간부터 많은 사람이 필리버스터를 방청하기 위해 몰렸다. 텅 비었던 의원석과 달리 방청석은 약 100여 명의 방청객들로 채워졌다. 참석한 시민들은 숨죽여 필리버스터를 진행 중인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의원의 말에 귀 기울였다. 초등학생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 중에서도 특히 앳된 얼굴의 청소년들이 많이 참여한 것이 눈에 띄었다. 이근호 씨(24)는 “옆에 교복을 입고 온 학생들과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을 보니 사안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들과 함께 방청을 온 임승헌 씨(19)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국회에서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볼 수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야당의 필리버스터 진행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아들과 함께 온 배찬우 씨(48)는 “야당의 필리버스터는 시간만 연장하고 아무 대책 없이 하는 것”이라며 “국가와 국민의 안전이 우선이기 때문에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킨 뒤 문제가 생기면 다시 고쳐나가면 된다”고 지적했다.

 

◇국회 밖에서 계속된 시민들의 목소리=국회 앞에선 40여 개의 시민단체가 제안해 시작된 ‘시민 필리버스터’도 진행됐다. 시민 필리버스터는 국회 안에서 진행되는 필리버스터와 별개로 시민들이 국회 앞에서 교대로 한 명씩 발언대에 서서 테러방지법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행사다. 지난달 23일 오후 8시 30분부터 시작된 이후 9일간 약 100여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참여했다. 시민 필리버스터를 진행한 단체 중 하나인 진보네트워크 장여경 정책활동가는 “시민필리버스터는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를 지지하고 테러방지법의 반대 취지를 알리기 위해 시작됐다”고 말했다. 시민 필리버스터와 함께 진행됐던 테러방지법 폐기 촉구 시민서명운동에는 지난달 22일부터 4일간 약 30만 명이 서명했다.

▲ 지난 달 23일 국회의사당 앞 '시민 필리버스터'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박주민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필리버스터에 대한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은 인터넷상에서도 드러났다. 유튜브에서 팩트TV가 생중계한 국회방송의 실시간 시청자 수는 평균 2만명대였고, 인터넷 방송 댓글 창에서 실시간으로 의견 교류가 활발히 이뤄졌다. 댓글 창과 SNS를 통해 시민들이 표명한 의견은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국회의원들에 의해 소개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국회의원들의 발언을 요약한 필리버스터 투데이 사이트는 9일간 40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방문하는 기록을 세웠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필리버스터 시민 참여 아카이빙’ 사이트도 만들어져 진행 상황과 여론조사 현황 등이 실시간으로 알려졌다.

 

◇꺼져버린 정치적 관심에 불붙인 필리버스터=여야의 테러방지법 관련 협상이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선거구 획정안 처리가 필리버스터로 인해 늦어지면서 일각에선 총선 연기론까지 등장했다. 이에 우려를 드러낸 더불어민주당이 필리버스터 종료를 선언하면서 지난 2일(수) 필리버스터는 종료됐다. 테러방지법은 여당안대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필리버스터에 대한 평가가 ‘선거용 정치적 쇼’라는 의견과 ‘불합리한 법안을 막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라는 의견으로 엇갈리는 상황에서 필리버스터는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김지미 변호사는 “우리 사회에 정치에 대한 혐오나 무관심이 만연해 있었는데 필리버스터는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박원호 교수(정치외교학부)는 “필리버스터가 유권자들에게 미칠 영향은 기다려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법안 자체를 상당한 깊이와 긴 시간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국민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말했다. 이번 필리버스터로 촉발된 시민사회의 ‘정치적 관심’이 계속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 김여경 기자 kimyk37@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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