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회]'여성안전정책 보호를 넘어 마을을 움직여라'

잠자리에 누웠는데 벽 너머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난다. 이어서 옆집 여자의 것이라 추정되는 비명까지 들린다. 당신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흔히 가정폭력의 현장에서 이웃들의 행동은 그저 끌려가는 가해자나 피신하는 피해자를 향해 웅성거리는 제삼자의 모습에 그친다.

이와 같은 현실에 ‘한국여성의전화’는 침묵과 무관심 속에 가정폭력이 방치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3년 전부터 은평구에서 ‘가정폭력 근절을 위한 움직이는 마을모델 만들기 프로젝트’(마을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역사회의 변화를 통해 가정폭력을 조기에 발견하고 당사자를 지원하겠다는 취지다. 지난 8일(화) 한국여성의전화는 토론회 ‘여성안전정책 보호를 넘어 마을을 움직여라’에서 가정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정책을 평가하고, 그 대안으로 한국여성의전화와 은평구 주민, 지역기관이 진행해온 마을프로젝트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구호에 그친 정부의 가정폭력 근절 대책=박근혜 정부는 출범 직후 국민의 안전을 위해 척결해야 할 4대 악 중 하나로 가정폭력을 지목하고 정책을 내놨다. 2013년부터 매년 정부가 발표한 종합대책엔 가정폭력 예방교육 의무대상 기관을 확대하고, 가정폭력 전담 경찰관을 배치하는 등의 계획이 담겼다.

그러나 이날 참석자들은 정부 정책이 현장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경찰의 초기 대응을 강화하겠다는 약속은 공수표에 그쳤다는 지적이 많았다. 가정폭력 사건이 접수되면 의무적으로 경찰관이 출동하고, 상습범의 경우 구속 수사를 진행하기로 했지만 정작 현장에선 이뤄지지 않았다. 실제로 2014년 남편에 의해 암매장당한 여성은 12년 동안 상습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사망 한 달 전 전치 2주의 진단을 받았는데도 남편에 대한 구속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어서 정부가 의식 변화를 위해 학교와 공공기관에 확대한 예방교육도 횟수만 채울 뿐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지난해 말 가정폭력 의무교육 대상기관 16,800개 중 16,549개가 예방교육을 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동안 시행된 교육의 방식과 효과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여성주의 활동가 김홍미리 씨는 “누구든 생애 한번은 폭력예방 교육을 받도록 제도가 구축돼있다”며 “그러나 양적 확장에 반비례하는 교육의 효과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여성의전화 정춘숙 이사도 “지난해 모니터링한 한 경찰서에서는 300여 명의 경찰관이 한꺼번에 교육을 받아 효과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다”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예방교육에서도 2개 반 학생을 강당에 모아 바닥에 앉게 해 아이들이 교육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최근 서울시도 여성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도시 구현을 선포했지만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에는 관심이 부족했다. 핵심 정책인 셉테드(CPTED)도 공공장소에 CCTV를 설치하거나 주택의 담장을 허무는 등 가정 밖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대상으로 환경을 설계하는 데 그친다. 마을프로젝트 방데레사 기획위원은 “셉테드는 외부의 모르는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범죄에서는 억제 효과가 있지만 집안에서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범죄에는 예방효과가 크지 않다”며 “환경의 물리적 변화만으로 범죄를 감소시키려는 방법은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여전히 우리 사회가 여성폭력의 전형적 이미지를 ‘공적 공간에서’ ‘낯선 사람’에 의한 범죄로 제한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탓에 가정폭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 지난 8일(화) 토론회에 앞서 사전행사로 '한국여성의전화'가 여성의 날을 맞아 광화문 광장 앞을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장미를 나눠주고 있다.

◇지역사회의 노력으로 정책의 빈틈을 메우다=이날 토론회에서는 가정폭력 근절을 위해 지역사회가 머리를 맞댄 은평구의 사례가 소개됐다. 2012년 은평구에서는 가정폭력 예방에 대한 돌파구를 지역사회에서 찾고자 한 이들이 모였다. 한국여성의전화 서경남 교육조직국장은 “지역사회에서 가정폭력을 누구나 알아채고, 관심을 가진 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마을프로젝트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폭력 근절을 목표로 다양한 지역 네트워크가 구성돼있지만 실제로 제 기능을 못하거나, 유지돼도 아동성폭력 사안에만 치중된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은평구의 가정폭력 전문가, 경찰서부터 의료기관, 종교기관까지 힘을 합쳐 마을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가장 먼저 지역 주민과 기관을 대상으로 가정폭력이 사회적 범죄임을 인지시키는 교육이 이뤄졌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가정을 치외법권 지역으로, 가정폭력을 부부싸움의 연장선으로 여겨 관여하기 꺼리기 때문이다. 이에 마을프로젝트는 가정폭력이 타인에게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끼치고 가정 파탄, 폭력성의 세습 등을 가져오는 엄연한 범죄라는 점을 중점에 두고 교육했다. 마을프로젝트는 지역 사정에 밝은 지역 여성들을 먼저 교육하면 이들이 피해자를 발견하고 자연스레 교육 내용을 전파할 것이라 기대해 새마을부녀회, 전의경어머니회 등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열었다. 두 번째 해인 2013년엔 지역 성당을 찾는 주민들과 서부경찰서 8개 파출소의 모든 경찰관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했다.

참석자들은 마을프로젝트에서 이뤄지는 교육이 각 주체의 실천에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기존의 예방교육과 구분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2014년 은평구 약사회는 은평구의 모든 약국에 ‘옆집의 고성에 이웃이 대처하는 방법’과 ‘가정폭력 상황에 놓인 사람이 도움을 받을 방법’이 적힌 약 봉투를 배포했다. 지역 병원에서도 병원 홍보물에 가정폭력 신고전화를 안내하고, 병원 내에 가정폭력 대처 지침서를 비치하고 있다. 김홍미리 씨는 전보다 많은 은평구 주민들이 주변에서 가정폭력이 발생하면 즉시 신고하고, 지역 기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피해자를 지원할 방법을 모색하게 됐다고 전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황정임 여성권익연구센터장은 “이전까지의 교육은 불편한 기분을 주고 끝나지만 마을프로젝트에서는 그 불편함을 걷어낼 수 있도록 지역사회가 해야 하는 일을 찾고 실천하는 구체성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참석자들은 토론회를 마무리하며 은평구를 넘어 다른 자치구에서도 지역사회의 노력이 활발해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순옥 서울시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장은 “지역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적극적인 개인으로 나서야 한다는 인식 하에 다른 자치구에서도 적용돼 확산했으면 한다”고 전했다.

 

사진: 김여경 기자 kimyk37@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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