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치즈인더트랩』의 주인공 유정 선배와 지난해에 방영한 드라마 <킬미힐미>의 차도현 부사장. 이 두 캐릭터는 경제력, 외모 등에서 여러모로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어딘지 비정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유정 선배는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타인과의 공감능력도 떨어진다. 자기에게 친절하게 접근하는 사람들의속마음을 의심하고 자신에게 거슬리는 사람들에게는 기필코 앙갚음을 한다. 차도현 부사장은 평상시엔 친절하고 차분한 사람이지만 갑자기 성격이 180도 변해 사람들을 당혹감에 빠뜨린다. 터프가이, 촌스런 아저씨, 우울한 남자아이, 심지어는 왈가닥 여고생까지 시시각각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는 그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한다.

▲ 몸은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베센 반 데어 콜크 /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660쪽 / 22,000원

미국 정신의학계 트라우마 연구의 최고권위자로 인정받는 베셀 반 데어 콜크 박사는 『몸은 기억한다』를 통해 유정 선배와 차도현 부사장과 같은 사람들이 겪는 성격적 장애의 기반에 트라우마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트라우마를 다른 정신질환과 혼동하거나 가벼운 문제로 치부하는 의학계의 현실을 짚으며 트라우마에 대한 총체적 이해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더불어 약물치료나 매뉴얼에만 의존하는 상담치료 등의 미봉책을 넘어선 환자 중심의 새로운 치료법을 도입할 것을 강조한다.

 

유령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가 하나의 병명으로 고정되기 전까지 트라우마 환자들은 정신의학계의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그들은 유정 선배가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이유, 차도현 부사장이 다중인격자가 된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약물 치료로 환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줄여주는 정도가 최선의 방책이었던 셈인데, 결국 의사들은 명확한 실체조차 파악할 수 없는 유령을 상대로 성과 없는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PTSD라는 정확한 진단명이 생긴 다음에야 오랫동안 정신의학계를 괴롭혔던 유령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트라우마는 과거의 충격적 사건에 갇혀 지금의 현실과 과거를 혼동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과거의 충격에 머무른다는 것은 뇌가 심각하게 손상됐음을 의미한다.

베셀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뇌의 편도체는 인체의 화재경보기로서 위기를 감지하는 역할을 하는데, 트라우마 상황이 지속되면 편도체의 오작동으로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위험 요소로 인식한다. 이로 인해 인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고 결국 트라우마 환자는 끊이지 않는 긴장상태에 놓인다. 감정에 연관된 뇌가 주도권을 잡으면 타인과의 교우관계와 개인의 창의적 사고에 관여하는 이성적인 뇌가 활동을 멈춘다. 종국에는 인간의 감정표현을 담당하는 뇌마저 고통을 피하고자 마비되는 쪽을 선택한다. 우울증, 조울증, 대인공포증, 주의력결핍장애, 해리성인격장애를 비롯해 신체의 감각이 무뎌지는 것과 같은 많은 문제가 합병증처럼 발생하는 이유도 트라우마가 뇌 전체를 손상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환자들의 심신을 괴롭히는 모든 문제들이 과거의 충격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환자의 일생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만 트라우마가 왜 발생했는지를 명확히 밝혀낼 수 있다. 뇌의 신호체계를 어그러뜨린 주범을 찾아내지 못하면 트라우마에 대한 분석 자체가 불가능하다. 환자를 충격에 빠뜨린 과거의 경험은 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한 고민 없이 단순한 매뉴얼로만 트라우마를 대하려는 것은 보이지도 않는 유령과 싸우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벽을 깨기 위한 용기

『몸은 기억한다』의 한 사례로 등장하는 캐시라는 이름의 여성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했다.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하고, ‘버드와이저’ 술병으로 성적 학대를 당하는 등 그녀가 겪은 학대의 수준은 처참한 지경이었다. 과거를 잊기 위한 돌파구로써 그녀는 학문에 몰두했지만 대인관계를 비롯한 일상생활 전반에서 많은 장애를 겪어야만 했다.

그랬던 그녀가 베셀 박사가 진행한 간단한 치료법으로 거의 완치됐다. ‘안구 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 EMDR)이라는 치료 방법이 활용됐는데, 이 치료법에서 의사는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천천히 흔들며 환자가 눈동자를 계속 움직이도록 유도한다. 그와 함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하는 것이 치료의 전부인데, 이 간단한 치료법만으로도 환자는 회복 국면으로 접어든다.

눈을 좌우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환자의 정신적인 안정감을 조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 치료는 환자가 심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자기 스스로 트라우마를 일으킨 과거의 사건과 마주할 수 있도록 돕는다. 환자는 그간 무의식적으로 무시해왔던 과거의 충격을 다시 인식하고, 그 충격이 지금까지도 일어나는 일이 아닌 과거의 일임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과거와 현실의 분리에 성공하면 비로소 환자는 트라우마로부터 온전히 회복할 수 있다.

베셀 박사는 트라우마 치료를 완료하는 것이 의사의 영역 밖의 일이라고 말한다. 환자를 이해하고 그들의 트라우마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환자들에게 맞는 치료법을 찾아주는 것까지가 의사의 영역이다. 트라우마 치료의 진짜 열쇠는 환자 스스로에게 있는 셈이다. 환자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쌓아올린 벽 뒤에 숨은 트라우마라는 악마를 없애기 위해의사가 해 줄 수 있는 역할은 망치를 쥐어주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그 망치를 가지고 벽을 부수는 것은 환자만이 해낼 수 있다.

곧 세월호 사건 2주기가 다가온다. 속수무책의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은 큰 충격을 겪어야만 했고 아직까지도 그 여진은 지속되고 있다. 그때의 충격이 대한민국에 남긴 상처는 어쩌면 앞으로도 끊이지 않고 우리에게 커다란 통증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아픔에 주저앉아버리는 것은 그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단 세월호 사건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울과 피로, 좌절과 고통의 뒷면에는 우리 몸이 자기도 모르게 기억한 과거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어딘가에 숨어있는 나쁜 기억을 찾아내야 한다. 베셀 박사의 『몸은 기억한다』가 우리들 마음의 회복을 향한 길을 밝히는 등대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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