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의 남용: 9/11 이후의 정치와 종교의 부패

리처드 J. 번스타인 / 류지한, 조현아 옮김 /

울력 / 198쪽 / 13,000원

지난 2일(수) 19대 국회에서 테러방지법이 통과됐다. 국민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우려하는 수많은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국회에서는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필리버스터가 진행됐지만 192시간 만에 종료되면서 결국 테러방지법은 통과됐다. 일부 정치세력들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이를 희생하면서까지 안전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사회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이는 테러라는 악에 대한 극도의 공포와 불안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번스타인은 그러한 악이 허상이라고 지적한다.

번스타인의 책 『악의 남용』은 2001년 9.11테러 이후 넘쳐나는 ‘악에 대한 담론’이 대중의 공포를 극대화해 정치·종교적으로 이용한다고 꼬집는다. 2005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최근 번역본으로 한국에 나왔다. 미국에서 처음 출판된 지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테러 위협과 공포, 그에 대한 정치적 담론이 끊이지 않는 오늘날 번스타인의 경고는 오히려 그 의미가 더 커지고 있다.

번스타인은 9.11테러 이후 질문과 사유를 차단하는 ‘악의 남용’이 일어나고 있다고 꼬집는다. 9.11테러 이후 미국 사회는 악에 관한 담론의 홍수를 맞이했다. 각종 방송과 신문에는 쌍둥이 빌딩의 붕괴 장면과 오사마 빈 라덴의 얼굴이 가득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 단체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집권세력은 선과 악의 은유를 들며 대중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실제로는 양분될 수 없는 세상이 아주 간단하게 ‘악한 이들’과 ‘악에 맞서는 이들’로 나뉘었다. 악에 대한 대중의 공포는 날로 커졌고, 정치인과 종교인은 그 공포를 이용했다.

저자가 이 같은 악에 대한 담론을 굳이 악의 남용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이런 담론이 자유로운 질문과 사유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양분될 수 없는 것을 선악으로 나누고,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치환하고, 공적 토론과 논쟁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적을 단순히 악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그 적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수많은 질문이 가능하지만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테러와의 전쟁을 주저하는 나약한 사람,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순분자로 취급된다.

이분법은 또다시 정치적·종교적으로 이용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를 벌인 야당 의원들이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자’라고 비난받은 일, 북한의 도발이 일어나 안보에 대한 불안이 커질 때마다 보수 정권 지지율이 상승하는 일, 미국의 정치인 트럼프가 이슬람교도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지지율을 올리는 방식 모두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공포가 너무도 커진 나머지 사회가 다른 가능성은 용납하지 않는 배타적이고 경직된 사고에 휩싸이고, 그러한 사고방식이 민주주의의 정체성마저 위협하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번스타인은 충분한 사유 없이 절대성, 확실성, 단순한 이분법에 의거한 이 같은 사고방식을 ‘절대주의적 멘탈리티’라 칭하며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시민들이 악의 정치적 남용에 저항하고 절대주의적 멘탈리티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대안으로 ‘실용주의적 가류주의(可謬主義)의 멘탈리티’를 제시했다. 무비판적인 절대성, 확실성, 이분법을 회의하며 어떤 신념이나 확신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질 때 비로소 세계는 갈등 해결에 한 발짝 가까워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번스타인 박사는 “민주주의는 연약하다”고 지적한다. 그것이 언제까지 존속되고 번영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선거와 공식적인 제도만으로 민주주의는 성립되지 않으며 언제든지 우리는 민주주의를 수호해 나가는 일체의 의미를 빼앗겨버릴 수 있다. 자유로운 소통과 다양한 담론이 있어야만 민주주의는 그 본연의 모습을 지켜나갈 수 있다. 무비판적으로 악을 규정하고 그에 대한 공포의 허상에 굴복해 우리의 자유를 포기할 때, 민주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기를 그만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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