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위안부 소녀상 조각가 김서경 작가

봄의 초입임에도 살을 에는 바람이 불던 날, 안국동과 광화문 사이 샛길에서 ‘평화의 소녀상’(소녀상)을 발견했다. 추위에도 움츠리지 않고 꼿꼿이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며 언 손을 녹이고 있자 곧 소녀상의 어머니 김서경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소녀상과 닮은 미소를 지으며 기자를 반겨준 김 작가는 익숙한 듯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페로 안내했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소녀상이 보이는 그 곳에서 김 작가는 연신 커피를 권하며 말문을 열었다.

 

흙과 인간에 빠진 민중미술가

김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흙과 친했고, 그래서 자연스레 흙을 선택한 것”이라고 조각가의 길을 선택한 계기를 말했다. 빌딩숲이 된 현재의 서울과 달리 김 작가가 어릴 적 뛰어놀았던 시절 서울은 흙내음 가득한 곳이었다. 지금도 땅을 밟으며 살기 위해 아파트가 아닌 주택에 거주한다는 그는 종이 위에 하는 스케치보다 흙을 빚어 조각하는 것이 더 쉬웠다고 했다. 중앙대 조소학과가 처음 문을 열었던 1984년 김 작가는 그곳에 입학해 같은 꿈을 꾸는 김운성 작가를 만났고, 현재는 부부이자 다수의 작품을 함께 만들어온 동료가 됐다. 그는 “남편도 마찬가지로 어렸을 적 진흙을 자주 가지고 놀았다”며 웃음 띤 얼굴로 서로의 닮은 점을 말했다.

김 작가는 조각가의 길 중에서도 예술로 시대와 호흡하는 민중미술이라는 갈래로 들어섰다. 학교 곳곳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김 작가는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구호적이고 선전적인 작업을 해나갔다. 그는 “시대가 우리를 만들었고, 미술을 매개체로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다짐했다”며 민중미술의 결을 따라간 계기를 설명했다.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사그라들면서 민중미술가로서 김 작가의 지향점에는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선전적 구호는 일회적이지만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미술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감동을 주며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미술을 매개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변함없으면서도 그의 관심은 따뜻한 감정을 가진 인간과 본래의 관심사였던 흙에게로 향했다. 그때부터 김 작가는 “정직한 흙을 통해 사람을 만들어내는 작업”으로서 여성과 어린아이의 모습을 주로 빚었고 흙과 사람이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작품에 손을 대지 말라는 표지판이 있는 전시가 있는데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다”고 고백한 그는 ‘작품에 마음대로 손 대세요’라는 콘셉트로 전시를 열었다. 흙으로 만든 그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단지 멀찍이 서서 감상해야 할 객체가 아니라 손으로 만지며 교감할 수 있는 자연 속 본래의 흙과 닮게 됐다.

 

아픔의 상징인 소녀가 탄생하기까지

민중미술가 부부가 소녀상을 만들고 위안부 문제에 적극 나서는 것은 언뜻 필연적으로 보이지만 그 시작은 작은 우연이었다. 2011년 1,000회째 수요집회를 앞둔 어느 날,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다 집회 현장을 목격한 김운성 작가는 수요집회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놀라움 뒤에는 죄스러움과 화가 찾아왔다. 그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과 여태 사죄를 하지 않은 일본에 대한 화였다. 김서경 작가는 “함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찾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물었고 정대협은 평화비를 제작해줄 것을 제안했다”고 이후의 일을 떠올렸다.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인 부부는 나아가 단순한 직육면체 비석 대신 소녀의 모습을 한 조형물을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소녀상의 탄생엔 평화비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에 압력을 가한 일본 정부의 ‘공로’가 컸다. 그들을 더 불편하게 만들 방법을 고민하다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인간 조형물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김 작가는 “할머니의 지금 모습이 아닌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즉 소녀상을 제작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결론까지 다다랐다”고 특히 소녀 조형물을 만든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끝나지 않은 아픈 역사를 목도한 그해, 김 작가는 자신이 사랑했던 흙을 가져와 소녀의 큰 틀을 빚기 시작했다. 그는 “소녀상에 담기게 될 의미가 너무나 나를 아프게 했기 때문에 남성인 남편보다는 여성인 나의 손으로 소녀를 만지고 빚어내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또 그는 “흙으로 소녀를 만들어내며 몰입하는 과정에서 할머니들이 받은 상처에 감정이입했고, 보는 사람도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길 바랐다”고 덧붙였다.

▲ 소녀상의 어머니 김 작가는 "내 아이의 세상에서는 아픈 역사가 끝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김 작가가 흙으로 소녀상의 틀을 만들자 남편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드러내는 상징을 부여하기 위해 어깨에 새를 놓고 발꿈치를 들게 했다. 김 작가는 “어깨에 놓인 새는 하늘나라의 할머니들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잇는 영매고, 들린 발꿈치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할머니들의 삶을 나타낸다”며 애틋하다는 듯 소녀의 모습을 묘사했다. 일본으로부터 강한 압력이 들어올수록 여리고 자그마한 소녀에게 점점 더 강인한 의지가 서렸다. 김 작가는 “일본의 끊임없는 압박에 소녀상의 펼쳐진 손이 꽉 쥔 주먹으로, 부드러운 얼굴이 좀 더 당당한 표정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아픈 과거의 상징으로서 부부가 만든 소녀상이 보는 이들의 사랑을 받자 곳곳에서 또 다른 소녀상을 제작해달라는 요청이 쏟아졌다. 부부는 흙으로 만들어 놓은 틀을 통해 소녀상들을 제작했고 마침내 소녀가 오래도록 정착할 보금자리가 27곳으로 늘어났다. 소녀의 모습이 변하기도 했다. 김 작가는 “소녀상이 처음 곧게 일어서게 된 것은 일본이 한창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을 때”라고 회상했다. 언제나 다소곳하게 앉아 있던 소녀상이 2014년 거제도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파랑새를 손에 든 채 일본을 향해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공감을 통한 미술의 힘

처음 설치할 때만해도 작은 조각상에 불과했던 소녀상은 현재 수요 집회의 상징이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동반자가 됐다. “우리가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과거의 걱정을 고백한 김 작가는 “처음에는 그저 사람들이 소녀상을 보며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박하게 염원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시민들은 소녀상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비가 오면 젖을까 우비를 입혀주고 눈이 오면 귀가 시릴까 모자를 씌워줬다. 김 작가는 이러한 광경을 목격하며 “어쩌면 ‘미술을 매개로 한 공감’을 통해 뿌리 깊은 논란의 역사인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발견했다”고 회상했다.

이에 김 작가는 ‘예술을 통한 공감’을 작품활동의 중요한 실마리로 삼았다. 그는 “세상을 변하게 만드는 동력은 아픔을 가진 미술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이 그것을 내 아픔으로 느끼는 데 있는 것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부부는 지난해 중국인 작가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 있는 한·중 소녀상을 제작했고 두 소녀 옆엔 그들의 아픔에 공감할 또 다른 소녀를 위해서 빈 의자를 남겨뒀다. 소녀상을 만들고자 찾아온 이화여고 학생들을 도와주기도 했다는 김 작가는 창 밖 ‘소녀상 지킴이’ 대학생들을 향해 눈길을 주며 “특히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김 작가의 손길은 다른 아픈 역사에도 가닿았다. 그는 “내 아이의 세상엔 슬픔이 없고, 여성이 폭력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이라고 계속해서 아픔이 담긴 미술을 이어가는 이유를 전했다. 미군 장갑차에 치여 세상을 떠난 미선이와 효순이를 추모하기 위해 그는 사고 9주기가 되는 2011년 추모 조각상을 만들었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잊힌 독립운동가,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먼지 쌓인 기억 속에서 꺼내 그들의 이야기를 조각으로 전시하고 싶다”고 답했다.

김 작가는 마지막으로 담담하게 일본 정부의 소녀상 철거 요구에 대한 말을 이어갔다. 그는 “일본은 할머니의 증언하는 입을 막고 수요 집회를 무력화시킬 수는 있지만 소녀상을 철거할 수는 없다”고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소녀상이 갖는 보이지 않는 상징성과 힘은 물리적으로 쉽게 밟아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를 불편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연대를 촉발시킨 힘을 보여준 김 작가의 예술. 아픔이 서린 그의 예술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억해야 할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진: 유승의 기자 july2207s@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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