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겸 교수

체육교육과

요즘 스누라이프에 들어가 보면 ‘저는 흙수저 oo과 ooo인데요’ 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이 ‘흙수저’라는 표현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부끄럽고 화가 난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흔한 표현이 됐기에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왜 이렇게 가볍게 넘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복잡한 감정들을 느끼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흙수저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글들은 진로에 관한 글인 경우가 가장 많다. 즉 자신의 미래가 현재의 가정환경에 의해 결정될 거라는 가정 아래 “흙수저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좋은 것이 뭐냐“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런 현실에서 자신을 스스로 흙수저라고 칭하는 학생들이 느낄 설움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나 자신의 경험 때문에 감정이입이 돼서 더욱 그럴 것이다. 20여 년전 군대에 다녀와서 학업을 계속할지 결정할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나와 같은 가정환경을 가진 사람은 교수가 되기 어렵겠다’라는 현실 인식이었다. 우리 학생들에게 미래가 현재에 의해 결정된다고 느끼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또 있겠는가? 교육자로서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대부분의 젊은이가 자신을 흙수저라고 부르며 이러한 현실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기성세대들은 이러한 학생들의 자세를 너무 현실주의적이고 진취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여전히 환경과 관계없이 사회적 성공과 실패 모두 학생 개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달려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교육자로서 학생들에게 해준 것이 없어서 미안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 초반에만 해도 우리의 과거, 특히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미개한 과거의 유물로 여겼던 것이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였다. 부모에 의해 양반, 상놈의 신분이 결정되고 그 신분에 따라 자식의 직업과 미래가 결정되는 조선의 반상제도는 많은 사람의 조롱의 대상이었으며, 이러한 불합리한 신분제도를 극복하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대한민국 사회를 자랑스러워했다. 이러한 신분제도의 역사적 진보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은 우리 사회 발전의 핵심 원동력이었다.

흙수저라는 표현의 등장은 이러한 미개한 신분제도를 혁파했다고 믿었고, 역사가 발전한다고 믿고 있는 많은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다. 양반을 바라보며 좌절했던 조선시대의 양민과 소수 금수저와 자신의 미래를 비교하며 한숨 쉬는 우리의 젊은 흙수저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가? 흙수저라는 표현으로 대표되고 있는 신분의 세습이 우리 학생들을 자포자기하게 만들고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우리 사회의 그 어떤 문제도 이보다 크고 시급하지는 않아 보인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모두가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 것에 화가 난다.

우리 대학부터라도 하나하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좋겠다. 최소한 우리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는 차별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많은 훌륭한 해결책들이 이미 제시돼 있다. 당장 실행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지만 당장 적용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쉬운 것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학내의 운동시설을 확충하고 교양체육 수업을 확대해 학생들이 함께 어울리는 공적 영역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스포츠를 통한 공적 영역의 확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운동권을 보장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제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결국 문제는 공감과 배려의 결여이며 명백한 불합리를 보고도 행동하지 않는 데 있다. 이제 우리 대학 교수들부터라도 강한 의지를 갖추고 힘을 모은다면, 사랑하는 우리 학생들이 금수저보다 훨씬 귀한 자신을 체념적으로 흙수저라고 부르는 일이 없는 우리 대학을 만드는 것이 요원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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