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엽 학술부장

영화 「늑대와 춤을」의 주인공 존 던바 중위. 그는 잔인한 전쟁에 회의를 품고 조용한 인디언 변경 지대로 배속 받은 군인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전쟁터에서 수많은 적군을 죽이고 공로를 세운 전쟁영웅이 아닌, 드넓은 땅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사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한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을 속박하던 원래의 이름을 버리고 인디언 친구들이 붙여준 ‘늑대와 춤을’이라는 진정한 이름을 얻어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반대로 소설 『순수의 시대』에는 이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처 뉴랜드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뉴욕 사교계의 총아였던 그는 가문에서 상속받은 엄청난 부와 비슷한 상류층의 아름다운 약혼녀까지 완벽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삶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엘렌 올렌스카를 만나면서부터다. 상류층 사회의 인습과 가식, 폐쇄적인 구조에서 벗어난 그녀의 자유분방한 행동은 그를 금방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상류층 남성으로서 지켜야 하는 예법과 전통, 그리고 가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엘렌을 사랑한 남자 대신 뉴랜드 가문의 아들이 되기를 선택한다.

이처럼 이름은 ‘나’라는 자아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이름에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과 역사가 들어있기도, 작명자의 미래에 대한 소망과 기원이 담겨있기도 하다. 이름은 내 주변의 세계를 결정하기도 하며 반대로 세계가 나의 이름을 정해주기도 한다. 다만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내가 꽃이 될 수 있는 것, 내가 나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나를 규정짓는 것, 그것이 이름이다. 그만큼 이름은 중요하다.

최근 흥행몰이와 함께 초판본 열풍을 불러일으킨 영화 『동주』속 윤동주 시인의 고뇌도 이름과 관련 있다. 윤동주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던 1940년대 초반 일본 유학을 앞두고 창씨개명을 강요당한다. 어쩔 수 없이 윤동주가 받은 새로운 이름은 히라누마 도주. 하지만 히라누마 도주란 글자 안에는 윤동주가 없었다. 한글 이름을 빼앗긴 히라누마 도주가 자신을 되찾기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시 쓰는 일이었다. 내가 나일 수 없었던 시대, 윤동주는 이름을 잃은 부끄러움과 함께 이름을 되찾겠다는 소망을 원고지 안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와 비교하기엔 죄송스럽지만, 2016년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우리의 이름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수업이 끝나고 지친 채 돌아오면 ‘고생했다’며 취업 이야기를 일부러 꺼내지 않는 어머니와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얼마 전부터 돋보기를 쓰는 아버지, 먼저 사회에 나간 선배들의 힘들다는 푸념과 멀리서 들려오는 누가 어디 합격했더라는 이야기에 가슴이 쓰리다. 우리를 분노케 하는 정치권의 행태와 돈 많은 자들의 화려한 모습과 뒤에 숨은 비리들, 사회의 모순 속에서 고통 받는 약자들의 한숨 소리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속에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이름은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더 이상 푸르지 않은 우리를 사회는 여전히 ‘청년’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그저 궁금해져 인터넷에 청년을 검색해봤더니 청년은 청춘(靑春)에서 따온 단어란다. 중국에서는 사계절 중에 봄을 푸르다 해 청(靑)색으로 불렀는데, 그래서 청춘이라 함은 푸른 봄을 가리키는 말이자 그에 더해 인생에 있어 원기가 왕성한 젊고 푸른 시절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회색빛이 더 어울리는 우리에게 청년이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흙수저니, 삼포세대니 하는 자조 섞인 새로운 이름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푸르지 않은 우리가 윤동주 시인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끄러움과 괴로움에도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는 그의 다짐이 고개 숙인 우리에게 “아직 너는 파랗다. 그러니까 나처럼 너의 이름을 포기하지는 마”라는 위로로 들려온다. 그래서 너는 71년 전 쓰여진 시 한편을 읽으며 너의 푸른 이름을 찾아 오늘도 어제처럼 묵묵히 애쓰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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