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예술가 레지던스 프로그램’ ‘예술나무 운동’. 이들은 문화예술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의 이름이다. 1973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문예진흥원)이 설립된 이래 국가는 문화예술 진흥과 관련한 많은 정책과 사업을 펼치면서 꾸준히 문화예술계를 지원해왔다. 우리의 척박한 문화적 토양을 개선하기 위해 시작된 예술 지원 정책은 여전히 예술생태계가 자리 잡지 못한 우리 현실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문화계를 뜨겁게 달군 예술 검열 논란이나 현재도 진행 중인 부산국제영화제를 둘러싼 행정기관과 영화인들의 갈등에서 보듯, 예술 공공지원에 대해 당국과 예술계 간의 뚜렷한 온도 차가 존재한다. 지원기관의 정치적 간섭 외에도 관 주도의 일방적인 행정, 민관 거버넌스 취약 등의 고질적인 문제가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대학신문』은 우리의 문화예술에 대한 공공지원 정책, 혹은 문화예술 행정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를 돌아보고 이제는 성장을 넘어 성숙에 이르기 위한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1. 문화예술 공공지원은 왜 필요한가

국가가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이유는 다양한 예술이 탄생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함으로써 국민이 풍요로운 문화적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다. 공공지원의 결과로 생겨나는 예술작품과 문화적 토양은 사회 공공의 삶과 긴밀히 연관된다.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이원재 소장은 “예술은 예술가만의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구성하는 뿌리에 해당한다”며 “예술가들의 미학적 성취와 실험의 성과는 사회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문화예술 지원은 여타의 산업 분야를 지원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양현미 교수(상명대 문화예술경영학과)는 “문화예술 지원을 사양산업에 링거를 꽂는 것처럼 보기도 한다”며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문화예술생태계를 만들고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문화예술 공공지원은 단순히 후원의 역할 이상으로 건강한 문화예술생태계 조성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접근에서 국가는 창작자, 향유자 등 예술의 장 안에서 활동하는 주체들의 관계를 살피며 생태계의 자생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을 펼치게 된다. 특히 복합장르예술, 독립예술 등 다양한 예술의 관객층이 상업예술보다 매우 얇은 한국의 현실에서 이는 긴요한 과제다. 이원재 소장은 “다양한 문화예술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공공의 영역에서 폭넓은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며 “돈이 되는 예술만 살아남는다면 그 사회의 예술적 수준은 후퇴할 것”이라고 공공지원의 필요성을 말했다. 국가의 문화 향유층에 대한 꾸준한 지원도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정책의 일환이다. 김세준 교수(숙명여대 문화관광학부)는 “문화예술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향유층이 공공지원 정책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공공지원은 꾸준히 변천·확장하면서 문화예술의 파이를 키우는 데 기여해왔다. 초기에는 기본적인 환경이 척박한 탓에 향유할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 시급했지만 점차 문화 인프라나 문화 향유,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지원 등 다양한 정책 방향이 생겨났다. 1960년대에 첫발을 뗀 문화예술 공공지원의 역사는 1970년대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되고 문학·시각예술·공연예술 등 분야별 지원사업으로 이어졌다. 이후 문화 인프라에 대한 관심을 갖고 예술의 전당, 국립현대미술관 등 대규모 문화시설과 각 지역의 문예회관 등 문화기반시설을 전국적으로 조성했다. 문화가 창작자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누려야 할 권리라는 인식 하에 문화 향유층에 대한 지원이 확대되기도 했다. 2000년대에는 예술지원의 규모가 커짐과 동시에 지방 분권화의 흐름에 따라 각 광역·기초자치단체 단위로 문화재단이 생겨나 지역별 지원사업이 실시됐다. 이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예술 지원으로 여겨지는 창작지원 사업은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촉진할 뿐 아니라 적지 않은 예술적 성취로 돌아오기도 했다. 예컨대 김소연 연극평론가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전체 연극 활동을 100이라고 하면 지원금의 수혜를 받는 경우는 15 정도”라며 “하지만 공공지원이 제공한 물적 토대로부터 한국 연극의 중요한 성과들이 나왔다”고 말했다.

 

2. 무너진 팔길이 원칙, 검열로 전락한 문화예술지원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술생태계의 자생성이 부족한 현실에서 한국의 공공지원은 지원이 창작의 필수 요소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영화나 뮤지컬 등을 제외하고는 충분한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은 대다수의 예술 분야에서 작품 활동만으로 안정된 수입을 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지난 3일(목)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에서 발표한 ‘2015년 예술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예술인의 2명 중 1명은 다른 직업을 병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예술인의 지난 1년간 예술활동 수입 평균은 1,255만원에 불과했으며, 특히 문학과 미술은 각각 214만원, 614만원으로 최하위 수준이다. 이는 예술가들의 전반적인 창작환경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에서 문화예술계의 공공지원 의존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는 오늘날 정치적 이유로 특정 예술가나 작품을 공공지원에서 배제하는 것이 사실상의 예술 검열로 작동하는 배경이 된다. 이원재 소장은 “지금 시대에 권력이 예술가를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원에 대한 것”이라며 “지원을 통제하기 위해 예술 지원기관을 통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 몇 년간 영화, 연극, 미술 등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어난 검열 사건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술위는 최대 2억~3억원의 제작지원금이 주어지는 창작산실 지원사업 연극 부문에서 극작가 박근형 씨를 배제하기 위해 작가에게 포기를 종용하고 심사위원들에게는 작품 탈락을 요구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다이빙벨」 상영을 둘러싸고 부산시와 갈등을 빚은 후 영화진흥위원회는 부산국제영화제 지원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묘사한 대형 걸개그림 ‘세월오월’은 광주 비엔날레 전시에서 제외됐다.

예술 검열 논란이 잇따르면서 문화예술 공공지원에서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ciple,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음)이 무너졌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예술위는 팔길이 원칙을 처음 천명한 영국의 예술위원회(Art Council)를 모델로 삼아 2005년 민간자율기구로 출범했지만 ‘문체부의 종속기구로 위상이 추락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소연 평론가는 “이전에도 크고 작은 갈등은 있었지만 지금은 예술 지원의 전문기관이라는 사회적 합의조차 사라진 상태”라고 평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예술위 지원사업 심사에서 소위 블랙리스트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심사위원의 증언이 공개된 사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지원작 선정과정에서 예술위 직원이 14명의 이름을 거론하며 선정에서 제외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서영인 평론가는 일련의 검열 논란에 대해 “특정 작가에 대한 개별적인 응징의 차원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총제적으로 문화예술계를 정부 입맛에 맞게 길들이려는 의도가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검열 논란에 대해 예술계는 원칙을 잃은 예술 지원기관의 행태가 창작자의 자율성 위축을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한다. 예술가들은 성명 발표와 항의 방문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검열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반발하고 있다. 부당한 정치적 간섭에 저항을 이어가면서도 공공지원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한다. 김소연 평론가는 “공공지원 제도를 넘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제도에 적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창작하는 시도가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공지원은 여전히 중요한 창작의 토대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검열로부터 자유롭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예술인 소셜 유니온 하장호 사무처장은 이에 대해 “예술위가 이런 작품은 지원할 수 없다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라며 “지원사업 없이 창작을 이어가기 힘든 상황에서는 검열에 반대하는 예술가도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3. 예술이 아닌 행정을 위한 지원이 되고만 현실

한국의 문화예술 지원에서 비단 노골적인 검열만이 아니라 문화예술 행정의 거듭된 파행도 심각한 문제로 나타난다. 지난해 예술위 문학 분야 공모사업에서는 사전에 공지된 심의일정과 지원규모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의 경우 예년에는 2월에 선정결과가 발표되던 것이 지난해에는 7월에야 발표됐다. 지원규모도 심사위원들이 선정한 102편(후보작 포함) 중 32편이 임의로 제외됐다. ‘우수문예지 발간 지원사업’ 역시 발표가 3개월 지연됐으며 당초 공고한 40종에 훨씬 못 미치는 14종으로 지원규모가 축소됐다. 당시 이 문제를 집중 제기한 서영인 평론가는 “어떤 협의나 의견수렴 과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일정이 늦춰지고 내용이 변경됐다”며 “예술 지원사업의 기본적인 합리성과 투명성이 실종됐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이러한 파행이 행정상의 불가피한 이유 없이 일어나며 기관이 이에 책임 있는 해명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해 언론보도와 국정감사 이후 창작산실 사업에 대한 검열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자 그때서야 예술위는 ‘사회적 논란을 예방하기 위해 작가에게 의견을 전달한 것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지원사업의 파행에 대해서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예술위는 올해 연극 창작산실 대본 공모에서도 선정작의 작품명과 작가명을 공개하지 않고 접수번호로만 발표해 또다시 불투명 행정을 이어갔다.

지원기관의 이러한 파행은 단순한 절차적 잘못이 아니다. 이는 당장 가시적 결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공공적 가치를 갖는 예술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는 행정 당국의 태도와 연관된다. 급기야 예술위는 지난달 16일 지난해 지원규모가 축소됐던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의 예산을 1/5로 줄이고 우수문예지 지원사업은 폐지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현재 우수문예지 지원사업의 경우 지난해 사업에서 탈락한 장애인 문예지 「솟대문학」이 폐간한 가운데 많은 문예지들의 고사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솟대문학」은 한국 유일의 장애인 문학지로 한국문학에 장애인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장호 사무처장은 “행정과 예술의 논리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를 매개하는 문화예술 행정만의 전문성이 담보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문화예술 행정은 일반 행정의 방식과 동일하게 운영되고 있다. 서울연구원 라도삼 연구위원은 “행정은 전문성도 추구하지만 기본적으로 안정성을 추구한다”며 “그러다보니 예술지원기관이 예술 정책을 기획하기보다 민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만 예술가들을 관리하는 조직이 되기 쉽다”고 지적했다. 현재 대부분의 공공지원은 지원기관의 사업공고를 보고 예술가가 신청하면 이를 심사해서 지원여부를 결정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이 과정이 행정의 사이클에 맞춰진 서류 작성과 사업보고, 정산 등의 절차로 진행돼 예술가의 창의성을 저해한다. 지원금 사용 항목이 세세하게 정해져있고 기관의 일정에 작업 일정을 전부 맞춰야 하는 등 창작과정에서 자율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라도삼 선임연구위원은 “공사 작업과 달리 예술 작업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전혀 결과가 달라지는 작업”이라며 “문화예술 행정은 예술가의 창의성을 살리기 위해 늘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직된 행정 절차가 실제 작품의 다양성과 예술성을 진작하기보다 예술가가 행정 업무에 숙달되도록 만들기도 한다. 극단 친구네 옥상 한재훈 대표는 “공연의 실제 퀄리티와 관계없이 서류만 잘 쓰면 되니까 공연이 아니라 서류 작업의 도사가 됐다”고 말했다.

예술의 특수성을 고려한 장기적 지원정책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행정과 예술의 상이한 논리를 매개할 전문 인력과 기관이 필수적이지만 이에 대한 행정 당국의 인식은 부족한 상황이다. 이원재 소장은 “현재 문화예술기관장에 전문성이 검증되지 않은 인사가 취임하거나 기관장 선임의 공백기가 지나치게 긴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며 “문화 행정의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는 비상식적 행태”라고 비판했다. 물론 예술지원의 대표기관인 예술위와 지역 단위의 지원조직인 문화재단이 매개기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전문 인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행정부와 지자체 등 상부의 통제와 잦은 인사이동 등 일반 행정의 관행 속에서 자율성을 잃어버리는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4. 예술할 맛 나는 공공지원, 건강한 생태계를 만드는 공공지원

문화예술 행정의 전문성, 다시 말해 예술지원기관의 정체성과 역할을 보장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정책·예산의 독립성 확보다. 독립성의 측면에서 예술위 설립 당시 주요한 모델이자 팔길이 원칙의 본산인 영국의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문화예술지원 거버넌스 체계에 관한 비교 연구」 (한승준 교수 외 2명, 2012)에 따르면 영국 예술위원회는 행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지만 집행 내용에 대한 보고 정도의 관리·감독만 받으며 예술지원업무의 자율성을 보장받는다. 예술위원회 또한 많은 예술단체와 예술가를 지원하지만 관리·감독하기보다 그들의 자율적인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팔길이 원칙이 지켜지기 위한 선결조건은 전문인력 확보와 재정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행정과 예술에 대한 이해를 겸비한 매개인력을 행정 일선에 충분히 배치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는 행정부와 지방정부 등 상부에서 내려오는 사업예산을 집행하는 비중이 높고 지원기관이 자율적으로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자체 예산은 부족한 구조도 개선돼야 한다.

지원의 전문성이 확보되고 나면 현장 예술계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해 좀더 실질적인 지원이 가능하도록 문화예술 행정에 민관 거버넌스를 구축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특히 최근 지방자치단체 주도의 도시재생사업이나 문화예술교육 사업 등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흐름을 볼 때도 행정기관과 예술계가 정책 파트너십을 맺는 것은 점점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라도삼 연구위원은 “행정기관은 지원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 예술의 창조성을 증진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는 한편, 예술계는 사회적 의제를 담아낼 수 있는 공공화된 조직을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화예술 분야의 민관 거버넌스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에는 여전히 현실적인 한계가 크다. 먼저 민간에서 조직된 역량을 가진 주체들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 정책 파트너가 될 만큼 강력한 예술인 단체가 없다 보니 대등한 주체로서 관과 협력하기 어렵다. 라도삼 연구위원은 “대등한 민간 파트너가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거버넌스는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의 문화예술 행정은 기본적으로 관이 사업을 주도하면 민간은 이에 동원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실정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공무원과 예술가가 함께 하는 민관 거버넌스를 만들어가려는 성북구의 실험은 관련 주체들의 정책 파트너십을 통해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고 있다. 성북문화재단(재단)과 성북구의 지역 예술인과 기획자 등이 모여 사업을 제안하고 실행하는 협의체인 ‘공유성북원탁회의’(공탁)가 바로 그것이다. 2014년 공탁은 원래 지역 예술가들의 네트워크로 시작됐으나 점차 성북의 문화예술 사업을 재단과 공동으로 기획하고 추진하는 민간 파트너로 발돋움했다. 현재 공간을 기반으로 운영과 창작을 병행하는 그룹과 예술마을 만들기 그룹 등 총 5개 워킹그룹이 있다. 그 중 20여 명의 예술가들이 재단 소유의 극장을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이곳에서 주민을 위한 공연을 여는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이 대표적인 공탁의 사업이다. 지난 2년간 민관 거버넌스를 독려하는 구청의 정책 기조 하에 재단은 공간·예산을 지원하며 지역 예술가들을 모으고 지역사회 의제에 대한 워크숍을 지속하면서 이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에 공탁에 꾸준히 참석하는 핵심 멤버들이 생겨나고 이들이 사업이나 공간을 중심으로 워킹그룹을 꾸려 문화예술 사업에 주도적으로 나선 것이다. 공탁은 재단과 같은 중간지원조직이 전문성을 발휘하고 공공영역에서 예술가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살아났을 때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희귀한 사례다.

한편으로 문화예술 행정의 독립성과 민관 거버넌스의 틀을 마련한 다음 요구되는 것은 공공지원의 방향과 비전의 정립이다. 지금은 현실에서 나타나는 표면적인 결핍을 해결하려는 단기 사업이 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안정된 창작 기반을 마련하고 예술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뚜렷한 비전 하에 장기적 지원이 이뤄져야 비로소 자생적 생태계의 형성을 내다볼 수 있다. 예컨대 지금 대학로는 이윤 창출을 주목적으로 하는 상업극과 창작역량을 바탕으로 신작 발표에 중심을 두는 ‘창작 중심 연극’으로 양분돼 있다. 이에 김소연 평론가는 “예술지원의 기본은 창작자에 대한 지원”이라며 “창작 중심 연극을 만들고 있는 민간극단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공지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원이 필요 없을 만큼 자생적인 예술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 창작역량을 갖춘 예술가들과 다양한 예술의 향유층, 개인·기업 후원자 등 국가가 아닌 생태계의 다른 주체들의 성장이 요구된다. ‘2014년 문화향수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문화예술 관람률은 미술 10.6%, 서양음악 4.9%, 연극 12.6%, 무용 2.4% 등 관객층이 상당히 미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예술에 대한 민간 후원도 수혜율이 8.1%로 높지 않은 수준이다. 양현미 교수는 “장기적으로 시민들의 문화향유력이 커지고 예술에 대한 민간 후원이 늘어나야 생태계가 자체적으로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화예술은 하나의 산업이나 시장 이상의 어떤 생태계다. 행정 당국의 검열과 파행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결과 창작의 주체들이 위축되기 때문이다. 경직되고 일방적인 행정 절차 또한 창작자의 자발적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좋은 창작지원 정책은 곤궁한 예술가들에게 돈을 보태주는 것보다 그들을 건강한 생태계의 주체로 만드는 것에 가깝다. 예술가들이 창의성을 자유롭게 발휘하고 예술할 맛 나게 하는 문화예술 공공지원이 좀더 필요한 이유다.

 

삽화: 이철행 기자 will502@snu.kr 이은희 기자 amon0726@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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