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부 김지수 기자

부끄럽게도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으로 향하는 첫 걸음이었다.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조용한 길을 따라 걷다가 소녀상이 앉아 있는 샛길을 발견했다. 그곳의 풍경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28일 이후의 논란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농성은 없었고 불어오는 바람만이 소녀상과 공사 중인 대사관 사이를 메우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뭉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소녀상 지킴이’를 자처한다. 단단한 브론즈로 만들어져 꿋꿋이 앉아있는 소녀상이건만, 왜 우리는 이 소녀를 지켜내야만 할까.

지난 한일 위안부 협정에서는 뜻밖의 안건이 올라왔다. 일본 측은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과 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가 된다”고 표명해왔고, 한국 정부는 “적절히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합의 의사를 밝혔다. 민간이 주도적으로 기금을 모아 제작한 동상을 철거하라는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일본 정부가 소녀상을 얼마나 불편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강제로 동원됐던 그 때 그 소녀의 모습을 한 동상은 이미 아픈 역사의 상징이 됐고, 그 어느 전략보다 효과적으로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또 하나의 상징물이 있다. 소녀상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이 상의 이름은 ‘베트남 피에타’다. 전쟁에서 학살된 아기를 꼭 껴안고 있는 어머니를 형상화한 베트남 피에타상은 소녀상의 부모인 김운성, 김서경 부부의 작품이다. 베트남을 여행하다 학살을 자행한 한국군을 향한 증오비를 발견한 부부는 우리 군인이 아무런 죄가 없는 민간인, 그 중에서도 아직 이름조차 없는 아이들까지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베트남 피에타상은 이러한 학살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제작됐고 한국과 베트남 양국에 설치될 예정이다.

누군가는 소녀상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베트남 피에타를 보면서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해보자. 일본인은 소녀상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고, 한국인은 베트남 피에타를 보면서 불편함을 느낀다. 과연 이것은 정답일까. 과연 이것은 피해국과 가해국으로 명확히 가를 수 있는 감정일까. 우리는 불편함을 느낀다고 해서 눈앞의 조각상을 치워버려선 안 된다. 피해국과 가해국으로 나눠져 단지 상징물을 가지고 다툼을 벌이기보다 이 불편함을 딛고 평화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

소녀상은 지켜져야 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피해의 상징이자 앞으로 올지도 모르는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베트남 피에타상도 지켜져야 한다. 두 상을 만든 부부 조각가는 “공감을 통해 희망을 이끌어 내는 것”이 조각상을 만드는 이유라고 말했다. 우리가 불편함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조각상들을 통해 발견해야 할 것은 어쩌면 불편함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공감과 평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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