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다란 스카이라인과 휘황찬란하고 화려한 도시, 서울.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좀 더 소박하고 정감 가는 서울이 있었다. 사라진 것만 같은 그때 서울의 풍경은 다행히도 곳곳에 남아 시민들의 감성을 자극하기도, 좋은 사료가 돼주기도 한다. 하지만 빠르게 진행되는 도시 개발과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그중 몇몇은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다.

서울미래유산은 서울시가 위기에 처한 도심 속 자산을 보호하기위해 선정한 유·무형의 문화유산이다. 아직 국가나 시에 의해 공식적으로 등록된 지정문화재나 등록문화재는 아니지만 향후 서울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모든 것이 등록 대상이다. 『대학신문』은 서울미래유산을 통해 과거의 서울을 만나보고자 한다. 과거부터 꾸준히 본래의 용도로 운영돼온 곳을 중점적으로 취재해 젊은 세대에게는 조금 낯설지만 이채로운, 기성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이 된 그때 그 시절의 서울을 그려보았다.

백년동안의 장인정신

1916년 이두용 씨가 개업한 종로양복점은 올해로 꼭 100년을 맞았다. 문화유산이라기에는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는 현대적인 건물 6층에 위치해 있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작은 철제 간판 아래 ‘since1916’이라는 숫자가 양복점이 지나온 세월을 고스란히 입증해 준다.

재개발로 인해 신문로 1번지로 이사를 갔던 양복점이 지금 위치로 재이전해 온 것은 2011년 무렵이다. 종로양복점은 1대 이두용 씨가 운영하던 때인 일제강점기와 2대 이해주 씨 때의 8.15해방과 6.25전쟁을 거쳐 1980년대 3대로 가업을 잇게 된 이경주 현 대표의 손에 맡겨졌다. 굵직한 근·현대사의 사건들을 모두 겪다보니 여러 번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경주 대표가 가업을 잇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처음에는 ‘양복을 배워 좋은 옷을 입어보자’하는 마음에서 시작했어요.” 그리고 좋은 옷을 입어보고자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청년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장인이 돼 손님들에게 질 좋은 옷을 만들어 주느라 정작 자신의 옷은 별로 없다고 한다. 어떤 장인이든 저마다 소중한 도구가 있기 마련인데 양복쟁이 이경주 대표에게 그것은 가위다. 대개 재단가위가 그렇듯 웬만한 성인의 손 한 뼘보다 컸던 가위는 계속 갈아내며 쓴 탓에 그 폭과 길이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처음보다 좁고 뾰족해지고 짧아졌지만, 장인과 나이가 비슷한 그의 가위에서 장인의 솜씨처럼 녹슬지 않은 예리함이 느껴졌다.

다른 장인들이 그렇듯 그 역시 손님들이 만들어진 옷을 마음에 들어할 때 뿌듯하다고 한다. “20~30년 전에 80이 넘은 할아버지가 찾아왔어요. 완성된 옷을 보고 한평생 이렇게 좋은 옷은 처음 입어 본다고 하셨죠.” 그러나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기성복이 늘면서 맞춤 양복의 수요가 많이 줄었다. 1980년대 수요가 한참 많았을 때 엄청난 작업량으로 손에 생겼던 흔적들과 굳은살들도 전보다 줄어들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이 다시 많이 찾아옵니다. 예복을 맞춰 입는 사람들도 많죠.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고 무척 기뻐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이경주 대표의 얼굴 위로, 오랜 세월 가업을 이어온 장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자부심이 떠오르는 듯했다.

“없으면 만들면 되죠”

아직 시민들에게 이용되고 있는 미래유산의 운영자들은 어떻게 하면 앞으로도 이것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중에는 수요가 줄어 금전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거나, 운영을 위해 전문 기술력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이처럼 단순한 노력 이상의 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새로운 운영자를 찾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다.

이에 비하면 동명대장간은 강영기 씨의 아들 강단호 씨가 대를 잇게 되면서 비교적 행복한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아마 이쪽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는 우리 아들이 가장 젊은 사람들 중 하나일 겁니다.” 불이 지펴진 화덕을 지켜보며 강영기 씨가 이야기했다. 물론 아버지로서 강영기 씨는 아들이 대를 잇는 것을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한다. “하던 사람들도 그만두는 힘든 길을 아들이 가려고 하니 반대를 했었죠.” 그러나 가업을 계속 이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아마 아들이 아니었다면 이 대장간은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세대 중에서도 도시에서만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대장간은 꽤나 생소한 곳이다. 현재 미래유산에 등록된 대장간은 총 4개로 그중 동명대장간은 8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가장 오래된 대장간이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강영기씨는 주변을 한번 슥 훑어보았다. “여기 이 화덕이랑 집게들도 예전부터 계속 써오던 것들이고, 기계들도 마찬가지죠.” 투박한 도구들로 만든 튼튼한 단조 제품들 덕에 인터뷰 내내 동명대장간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계속됐다. 작업을 하다가도 알맞은 제품을 찾는 손님들에게 “없으면 만들면 되죠”라고 말하는 강영기씨에게서 장인의 여유가 느껴졌다.

공통의 감성

서울대 관악캠퍼스와 무척 가까운 거리에서도 미래유산을 만나 볼 수 있다. 정문에서 녹두거리로 가는 길 관악문화관 앞 주차장에는 눈에 띄는 버스가 있다. 버스 위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스넥카’라고 적힌 간판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국수!우동!’이라고 적힌 간판을 볼 수 있다.

뒷문으로 승차하면 우리에게 어쩐지 익숙한, 소위 ‘아날로그적 감성’이 가득한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스넥카는 1970년대 현금 수송차량을 개조해 영업을 시작했는데, 곳곳에서 아직도 그때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지금은 입구로 쓰이는 문은 본래 현금 수송차량에만 있는 특이한 구조다. 문에 붙어있는 차량 번호판은 이 차의 역사를 입증해주는 증인과 같다. 총 13대였던 스넥카는 1986년도 서울아시안 게임을기점으로 리모델링을 거쳤는데 당시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차)에서 제작한 차량번호판은 아시안게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86으로 시작하는 번호를 달았다.

지금의 모습은 현재 스넥카를 운영하는 하태광 씨와 가족들의 작품이다. 스넥카 내부의 소품들은 각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평소 운영을 맡고 있는 하태광 씨 어머니는 소품에 담긴 이야기를 하나씩 꺼냈다. 어린이 손님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장난감들, 스넥카의 추억이 담겨있는 딸의 그림, 여기저기 붙어있는 시와 그림에는 어머니의 취향과 생각이 담겨있었다. “내 아버지는 나갔다 오실 때 종종 이런 장난감을 사오셨어요”라며 꺼내든 어머니의 어릴 적 추억에는 직접 겪지 않아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공통의 감성이 녹아있었다. 스넥카를 운영하는 이유를 묻자 어머니는 근 50년간 급속도로 발전한 서울에서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으니 과거와 현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시간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냐고 이야기했다.

▲ 삽화: 이철행 기자 will502@snu.kr

현재까지 등록된 미래유산의 개수는 총 378건이다. 이들 중 어떤 것은 우리와 함께 우리의 일상 속에서 공존하다가 미래에 서울의 모습을 증언하는 가치 있는 유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먼 훗날 ‘응답하라 2016’이 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16년 서울의 추억을 전해주는 고마운 것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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