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이장욱의 시 「감상적인 필름」과 「투명인간」(『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사, 2002)

감상적인 필름

 

1 X-Ray

사기 치지 말라, 高手는 그냥 느낀다, 그대 생을 증거하는 단 하나의 표식은, 그대의 육체이다,

라고 선언하는 한 장의 흉흉한 사진 앞. 사진 속의 험산유곡. 김내과 진료실에서 멍하니 바라보는 내 검은 흉부.

 

2 X-Ray

이곳의 일기는 불안정하다. 적막한 오후의 渡江. 덜컹이는 음률 속에 여의도가 떠 있다. 내 사소한 절망이 저 섬의 정치경제학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나를 안심시킨다. 고인 물, 고요한 오후. 어제는 대부풍의 영화를 보았는데, 이상하지 그 어떤 장엄한 최후에 대해서도 나는 희희낙락했을 뿐. 내 정치적 상상력이 오후 네시의 누아르를 닮아간다는 사실을 무심히 깨닫는 나날. 곧 어두운 구름이 몰려오겠지만, 한없이 사사로운 바람이 부는 날에만 내 죽은 여자의 사진은 깊다. 고인 물, 오후 네시.

 

3 X-Ray

내겐 악기가 없었다. 어쩌면 수화를 배웠어야 했네. 끓는 물, 인생이 몽땅 통과의례뿐이군. 원래 알고 있었잖어? 지극히 단순한 자세로 통과하는 이 길 끝의 사진 한 장이 나를 규정한다. 고무다라이 안의 깊은 물 앞에 공포에 찬 눈으로 서 있는, 저 발가벗은 세 살의 유년. 나는 아직도 끓는 물에 발가락을 대어보는 정지 포즈로 저렇게 서 있다. 마음의 수면에 피어오르는 이상한 기체. 어두운 비, 천천히 쏟아진다. 남모르게 일렁이는 생후 삼십 년의 육신.

 

4 X-Ray

언젠가 일생의 네가 필름이 환히 드러나는 날을 맞을 것이다. 고백은 지겹다, 모든 고백은 거짓이다,

라고 선언하는 한 장의 어두운 사진 앞. 검은 리본을 두르고 유일하게 일생을 증거하는 그 눈빛이, 나를 바라본다. 無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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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문득 스스로를 느낄 수 없는 하루가 온다. 세면. 식사. 여자의 전보. 이곳은 아름답군요 언제 서울로 돌아갈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그대의 소식을 두고 외출한다. 등뒤에서 나의 몫으로 주어진 시간을 폐쇄하는 문. 여기가 문 밖인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사물들. 아무렇게나 아름다운 것들, 가령 담배꽁초. 보도블럭. 초로의 여자가 나누어주는 <일수돈 씀니다>.

어쩌면 몇 편의 죽음만으로 한 시대를 설명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종로 2가의 가로수. 종로 1가의 바람. 크로포트킨 공작이 무의미한 세계를 견디지 못해 아나키스트가 되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광화문의 바람. 가로수. 다시 바람. 정신분석은 지겹다. 십수 년 전 바움 테스트에서, 나는 고의로, 부러진 나무를 그렸다. 의사는 치유할 방도를 강구하자고 말했다. 그가 내게 준 것은 僞藥이었다.

그러므로 아직도 나와 친한 것들은 스스로를 오래 묵인하여 죽어가는 것들이다. 가령 무언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열해 있는 간판들. 시월의 태양 아래 혼자 끓는 육체. 손차양 사이로 문득 햇살이 무심하다. 이순신 상 곁을 날아가는 지중해行 종이 비행기. 생각난다, 이런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불긋한 색종이라도 접어 유장한 강물에 배 한 척 띄웠을는지, 그 배 지금쯤 멕시코 만 어디서 좌초했을는지.

교보빌딩 화장실 변기 위에 달린 자동 감지기. 내가 다가가면 붉은 등을 켜는, 내 유일한 존재 증명. 그대가 서울에 없으니까 죽도록 쓸쓸하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고 나는 전보를 치지 않는다. 거리에 도열한 간판들은 고의로 부러진 나무들처럼 고요하다. 또 위약이군, 중얼거릴 때 내 몸을 가볍게 통과하는 종이 비행기. 아주 조금씩 스스로를 지워가는 사물들과 더불어, 다만 어느 날, 투명한 지중해의 햇빛 속을, 산보라도 할 것.

▲ 삽화: 이은희 기자 amon0726@snu.kr

위의 두 시는 거의 완벽하다. 우울하나 확고한 어조, 단순하지만 명확한 이미지, 난해하지만 강력한 전언, 이 셋이 한데 엉켜서 삼위일체를 이룬다. 명확한 이미지는 난해한 전언을 밀어 넣고, 강력한 전언은 우울한 어조를 받쳐주며, 확고한 어조는 단순한 이미지들에 생기를 붙어 넣는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감상적인 필름」이 형식적으로 더 완벽하지만, 「투명인간」의 문장들은 형식적인 부족함을 덮고도 남는다. 보도블럭, 종로 1가의 바람, 간판들, 교보빌딩처럼 단어 단위로 무심하게 내뱉어지는 풍경은 너무나도 일상적이라 따로 떼어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시에서는 적재적소에 배치돼 어조를 확립하고 표면적 의미 이상의 감흥을 가져다준다. 크로포트킨 공작, 멕시코 만, 지중해 등의단어들은 갑자기 튀어나와 앞의 일상적 시어들과 확연히 대비되면서도, 기괴한 질감 하나 없이 마술처럼 시에 통합돼 버린다. 투명인간, 위약, 자동 감지기, 이 비유들은 문학 역사에서 수십 번도 더 우려먹을 정도로 쉬운 소재로 쉽게 진부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들이 여기서는 앞선 문장들 위에 차근차근 얹혀 ‘내 유일한 존재증명’이라는 어구로 탁월하게 수렴되어, 다음 시로 이어질 전언을 유려하게 전달한다․ ‘나를 증명할 것은 오로지 내 육체뿐이다.’

「감상적인 필름」에서 검은 흉부, 누아르, 어두운 구름, 어두운 비, 네가 필름, 검은 리본과 같은 시어들은 한 연에 한 두 단어일 뿐이지만 아예 시 전체를 흑백사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어두운 배경 위에서 각 연마다 제시되는 4장의 사진들, 즉 자신의 흉부 사진, 여자의 사진, 내 어릴 적 사진, 그리고 누군가의 영정 사진은 엑스레이처럼 내면을 파고든다. ‘사기 치지 말라’라는 통렬한 지적으로부터 시작해, ‘내 사소한 절망이 저 섬의 정치경제학과 무관하다는 사실’과 ‘아직도 끓는 물에 발가락을 대어보는 정지 포즈로 저렇게 서 있다’로 이어지는 매력적인 어구들은 그런 꿰뚫어봄의 산물이다. 사진의 대상은 자신-타인-자신-타인으로 변경되지만, 실은 모두 타인처럼 읽힌다. 나의 내면에 있어 나의 육체는 아예 다른 차원의 것이다. 결국 존재가 명징하게 증명되는 육체와 달리 내면은 언제나 흐려져 있다. 모든 것을 꿰뚫어본 엑스레이는 마침내 모든 고백이 거짓이라고, 내면은 없다고, 無心이라고 선언하면서, 「투명인간」에서 제시되던 전언을 더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짧은 해설을 하려 했지만, 내가 받았던 ‘느낌’이 얼마나 제대로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늘 어렵다. 솔직히 말해 좋은 시에 대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한 것이온데, 왜 홍시 맛이 나느냐고 하오시면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밖에...”(드라마 <대장금>의 대사 중에서 변형) 좋은 것은 좋으니까 좋은 것이다. 좋다는 건 느낌의 영역이며, 느낌은언어로서 존재하지 않고 느낌 그 자체로서(혹은 ‘육체로서’) 존재한다. 왜 좋은지 말을 하려고 노력해도, 말하고 싶은 바는 끝내 말하지 못하고 끝이 나버린다(그리하여 모든 고백은 거짓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말했듯, 인간의 세 가지 권능인 사유, 의지, 느낌 중에서 결국 사유와 의지는 느낌의 합리화일 뿐이며, 그것도 가까스로 닿을까말까 아슬아슬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시에 있어서는 이 ‘느낌’을 부정하는 것만 같다. 부정한다기보다는, 느낌만으로는 언제나 성에 안찬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시를 ‘이해’하려고만 한다. 어쩔 때 보면 그것이 유일한 목적인 양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에 실패한다. 그리곤, 어쩌면 당연하게도, 시가 너무 어렵다고 불평한다. 그들을 비난하거나 나무라려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의 원인은 개인이 아니라 한국의 국어 교육 체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에 대한 그런 강박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맛있는 걸 먹었을 때 굳이 그 맛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걸 세세하게 이해하고 평가하여 어떤 범주에 집어넣으려 하는 일은 ‘요리연구가’의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나 할 법한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의 ‘육체’로 그 맛을 ‘즐기는’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읽었을 때의 그 느낌, 그 느낌을 굳이 단순한이해의 “.”로 끝낼 필요가 없다. 느낌 그 자체에 기댄다면, 그것은 길 잃은 “?”로 귀결될 수도 있겠지만 종종 강렬한 “!”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방금 두 시의 장점 중 하나는 쉽다는 것이었다. 쉽다는 건 거기 담긴 내용이 얕다는 뜻이 아니라, 저 두 시의 매력이 금방 들어온다는 뜻이다. 인간의 육체와 내면, 그리고 그에 따른 존재론이 단 몇 줄에 압축돼, 시가 갖는 가장 큰 매력인 ‘형이상학적인 감각’이 부각돼 있기 때문이다. 시각을 사로잡는 미술과 청각을 지배하는 음악과 달리, 시는 언어를 매개로 하여 여타의 감각들을 모두 다룰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간접적인 형태일 뿐이며, 각각의 방면에서 미술/음악 같은 다른 직접적인 예술들에 ‘압도적으로’ 밀리곤 한다. 시로 그려낸 풍경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제대로 된 그림 한 장만 못하다. 결국 시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다룰 수 있는 감각은, 언어를 재료로 하는 예술만이 가 닿을 수 있는 형이상학적 감각이다. 종종 시가 철학을 담고 있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단순히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좋은 시는 철학을 넘어서, 언어를 넘어서, 이미지를 넘어서 사유하게 만든다. 혹은,사유를 감각하게 만든다. 위의 두 시는 이 매력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 부디 읽으면서 이게 무슨 말인지 그 감(感)이 왔기를 바란다.

그러니 한 번 시를 읽어보라, 읽어보라, 시가 없으니까 죽도록 쓸쓸하다고 나는 쓰지 않는다. 단지, 그대의 대학 생활을 증거하는 어떤 필름이, 어떤 느낌이 남았는가.

無心하다.

 

총문학연구회 김시온(경영학과·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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